눈 앞에 보이는 큰 나무에는 언제나 다람쥐 서너마리가 서로를 쫓아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그 녀석들 장기자랑을 보다 보면 아침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홀로 앉아 뜨겁고 향이 짙은 홍차를 한 잔 마신다.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강렬한 태양이 창문에 걸려 있고 그 밑으로 새빨간 새가 나무에 앉아 나를 보며 노래한다.
자연은 이미 정해진대로 움직이고 내가 침입자 혹은 관찰자가 되어 있다. 작년 이맘때 일리노이주 시골에서 휴스턴 근처로 이사왔는데 일 년만에 또 다시 시내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한다는 것, 한국처럼 전화 한 통에 사람들이 달려와 사다리차를 유리창 입구에 대고 무거운 짐을 척척 나르고 포장해주고 우리는 차에 올라타면 끝나는 그런 이사와는 전혀 다른, 너무 달라서 상상할 수 없는 이곳의 이사는 이곳에서의 삶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나의 짐을 옮기는 것이므로 내가 책임지고 완벽하게 포장을 해야 한다는 것.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매 글에서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서른이 넘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눈 깜짝할사이 달아나 주말이 오고 또 다시 월요일, 그리고 토요일. 이런 일반적인 삶이 이제는 당연해 질 법도 한데 전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고 뒤쳐져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느슨한 이곳에서의 삶이 벌써 1년 그리고 6개월이 지나고 있다. 여전히 어학원에 다니고 있고 새로운 친구는 그리 쉽게 생기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혹은 남편과 지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때부터 친구들과 수다 떨기 보다는 소설 속 주인공들과 함께 모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 요즘은 쉽게 쓰여진 영어로 된 소설을 읽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나의 수준이 가히 대단하지 않아 간략한 10대들의 이야기를 보며 공감하는 중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보며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우연, 그림과 음악, 삶과 죽음에 대해 깊게 이야기 나눠본 게 꽤나 오래된 것 같다. 의도적으로 나 자신을 작은 방으로 밀어 넣어 내가 언제나 하려고 했던 그 일, 본질에 대해 묻고 또 묻고 싶지만일상 과의 타협은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눈을 뜨면 남편과 함께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고 어학원에 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만들고 먹고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 단순한 일상이라니 ! 단 한번도 꿈 꿔본적 없는 규칙적이고 단순한 삶이 내 양쪽 어깨를 꽉 잡고 앞을 향해 걷게 만든다.
우연히 발견한 피터 한트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곤 그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어떠한 말이 필요할까. 한 사람의 인생이 그토록 짧고 부질 없다는 것을 짧은 단어, 간결한 문체로 표현한 그의 글에 나의 삶을 투영 해본다. 나는 무엇이 부러운 적 없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었고 대체적으로 남들보다 원하는 것이 조금 덜했었다. 기억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엔 엄마가 치마를 입히면 예뻐보이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 엉엉 울었고 바비 인형을 가져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적도 없었다. 언제나 두 살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니며 보살펴주던 누나였고 전학을 자주 다닌 탓에 오래된 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었다. 가끔은 너무 씩씩해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 이유없이 울곤 했던 예민한 사람이었다.
나는 세상에 당당해 보였지만 주눅들기도 했고 타협하고 싶었지만 한계를 넘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 호기심은 스물 한 살, 몇 달을 헤매고 다닌 유럽 여행에서 폭발했고 친구와 함께 러시아에서 스페인까지 모든 육로를 통해 여행하며 확고해졌다. 나는 타고난 모험가였다.
인도, 바라나시를 다녀온 뒤 그 호기심은 지식과 지혜의 간격을 허물고자 하는 욕망으로 변했으며 결국, 철학의 늪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내 자신을 발견함과 동시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늪과 현실의 모호한 지점에 잠시 서 있는 중이다.
이곳에 가을은 없었다. 작년, 1년동안 살던 그 곳은 한참 개발중인 곳이라 오래되고 큰 나무는 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더운 기온 탓에 당연히 가을은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이사온 이 동네엔 크고 울창한 도토리 나무, 소나무 같은 나무들이 많고 신기하게도 계절이 변한 걸 알아 채기도 전에 단풍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완연한 가을빛으로 주변이 뒤덮여있다. 한국에서 살 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냄새에 한껏 들떠 여기저기 가을이 온다며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휴스턴은 자, 이제 가을이야. 라고 말하긴 애매한 날씨가 계속된다. 어느 날은 자고 있는데 너무 추워서 이불을 하나 꺼내서 덮고 자다가 더 추워서 에어컨을 확인해 봤더니 집안의 온도가 5도였다. 자기 전까지도 더워서 에어컨을 틀고 있었는데 밤이 지나며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온 집안을 휘감아 추위에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루는 서늘하고 하루는 덥고, 또 하루는 봄날 같고 어떤 하루는 가을 같고. 도통 예측할 수 없는 날씨탓에 소매가 짧은 셔츠를 입고 추워하고 부츠에 코트까지 걸치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도 한다. 한국처럼 오늘부터 가을, 이제 곧 첫 눈이 내리니 당연히 몇 달 동안 겨울,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니 봄이 올 거라는 당연한 계절의 변화는 이곳에 없다. 조금 흐리고 서늘한 -겨울이라 불리는- 가을도 봄도 아닌 애매한 계절이 지나고 나면 뜨거운 여름이 지속될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더 따뜻하고 차분한, 그리 눈에 뜨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계속 따뜻한 이 곳의 날씨처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 가다보니 할 말이 너무 많아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는다. 게다가 영어가 아닌 한글로 생각을 하고 글을 쓰다 보니 배 안에 나비가 한마리 날아다니는 것처럼 마음이 간지럽다. 이렇게 수다스러운데 이 많은 단어와 생각과 글을 다 어디에 쌓여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처음 여행왔을 때, 이 곳에 20년 넘게 산 분들의 대화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 나라” 라는 단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왜들 그리 한식을 먹는지, 미국식으로 멋지게 꾸며놓은 집과 쾌쾌한 된장냄새는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외국에 살면 으레 그 나라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생각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살아보니 된장찌개가 아닌 청국장을 끓이게 되고 냄새는 싫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이 있다. 대부분 언어가 아닌 눈빛과 감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아 외골수가 되어 간다. 그림움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익숙한 것들을 더 움켜쥐게 되는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내면의 나는 수다스럽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과민하고 과묵한것일지도 모른다. 그럴때일수록 나는 익숙한 것들을 회피하고 낯선 미지의 것들을 일부러 끌어들여 내 자신을 중화시킨다. 세상이 너무 좋아져 넷플릭스에는 한국 드라마가 즐비하고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그 드라마를 틀어놓고 살 수 있지만 드라마 속에 보이는 한국, 내 나라, 익숙한 그 풍경들이 오히려 그리운 마음을 짙게 만들어 보는 내내 불편함에 휩싸이기에, 오히려 더 낯선 나라의 것들을 찾게 된다.
그리움의 편린은 금세 증발한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새로 이사한 3층집 구석구석 먼지를 털고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청소기를 들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청소를 한다. 건조기에서 갓 나온 뜨끈뜨끈한 빨래를 접어 정리하고 점심에는 으레 피자나 햄버거를 먹었을 남편을 위해 김치찌개를 끓인다.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일본쌀을 정성스럽게 씻어 밥을 하고 아빠가 구해준 파래김에 참기름을 발라 소금을 뿌려 굽는다. 우와, 이게 무슨 맛있는 냄새야? 라며 웃으며 들어오는 남편을 보며 난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구나, 나의 삶이 이토록 간결한 적이 있었나. 라고 안도하며 함께 저녁을 먹는다.
지난 주말, 처음으로 동네 주변을 산책했다. 이곳의 뜨거운 햇살을 11월이 되어서야 겨우 옅어졌고 비로소 우리는 걸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리집 앞에서 놀던 다람쥐들은 사람이 다가가도 움직임 없이 아그작거리며 도토리를 까먹고 있다. 처음으로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을 주웠는데 그 크기가 정말 너무 커서 다람쥐 녀석들의 허벅지가 왜그리 통통한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주변을 둘러보고 걸음을 맞추고 나란히 걸으며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는 그 시간. 다람쥐가 떨어트린 도토리 껍질을 보고 텍사스 도토리의 위엄을 관찰하며 우리는 주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은 되돌리고 싶어도 지나가고 있고 너무 소중해 움켜쥐고 싶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같다. 이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아니, 나는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