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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Oct 22. 2020

ㅇㅂㅈ

'ㅇㅂㅈ'.


휴대폰 연락처에 딱 한 사람, 이름을 자음으로만 표기해 저장했다. 아버지란 사람이다. 아버지라 저장하긴 싫다. 아버지답지 않아서다. 이름을 적긴 어색하다. 아무튼 그는 나의 유전적 근원이고 연장자이기도 하니까.  


우리 가족과 그가 따로 산 지 꽤 됐다. 십오 년간 네 다섯번 만났다. 예전에는 더 자주 만나야겠단 생각을 했으나 최근에는 서로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아 아예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 됐다. 과거와 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사람이 됐다. 나이를 먹는다고 사람이 다 현명해지는 건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약해지기만 한다.  


가끔씩 그는 어머니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황당한 요구를 하거나 끔찍한 말을 했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나는 그들의 핸드폰에서 그의 연락을 차단시켜놨다. 그 이후로 그는 가족에게 할 말이 있으면 나를 통해서만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그가 합당한 요구나 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말을 해주길 바랐으나 그런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실망감과 분노를 느끼곤 했으나 요샌 그가 술 먹고 전화를 걸어도 그러려니 한다. 술 먹고 전화하지 마세요. 이 정도로만 말하면 그는 싸가지 없는 새끼, 하곤 전화를 끊는다.  


이런 그도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진 가족의 주축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와 외가 쪽 친지분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아주 가끔씩 만나는 먼 친척들 중에선 내게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네 아버지는 그래도 착한 사람이었어. 그는 술 한 잔을 따라주며 그게 그의 숨겨진 장점이라는 듯 말했다. 착하다는 게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말이다. 내게도 그가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단 인상이 남아있긴 하다. 아주 먼 기억에서 그는 내가 유아용 고무 배트로 날린 고무공을 잡으러 뛰어가고 있다. 햇빛이 쨍한 날이었다. 그는 주워 온 공을 다시 내게 던졌고 나는 다시 그걸 받아쳤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라며 나와 여동생에게 간단한 토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토스트였다. 기억 속의 그는 그러나 너무 희미해져 버렸다. 오래전 그와 우리 가족은 어떤 이유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그건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이후에 그가 나에게 종종 전화를 걸어 토로했던 주체하지 못할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를 반복하는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안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와 거리를 둘 수 있다. 기피할 수 있다.


이런 비정한 나도 그를 떠올릴 때가 있다. 거울에서 그의 얼굴이 보이고 어렸을 적 들었던 그의 웃음소리를 내가 낼 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혹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심신의 일부분이 유전자가 새겨놓은 방향성을 따른다는 건 내겐 좀 무서운 일이다. 그는 내게 타인이지만 다른 타인과는 다르다. 서로 별개의 삶을 살고자 하나 서로 완전히 별개일 순 없는 관계다. 그래서 언젠간 그를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보면 아득하다. 만나면 서로 원망 어린 언어를 토해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마음이 풀린다면 아픔은 덜 수 있을 것이다. 매듭짓지 못한 감정이야말로 끝없이 덧나는 상처로 남아 흉터로도 아물지 못하니까. 다만 상상에서라도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가 만나 오랜 시간 대화하더라도 여전히 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걸 확인한 채 돌아서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그가 우리 가족을 놓아주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내가 당신을 찾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내가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다 지금의 그의 나이쯤이 되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아직 아버지가 되기 전인 나와 같은 나이의 자신은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건 핑계일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할 순 없다는 핑계로 그를 이해하지 않기로 한 나는 자기 방어적이고 타인에 무관심한 사람일 수 있다. 정말 그렇다면 술 취한 그와 통화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울분이나 슬픔, 죄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를 만나려면 이 고통에 완전히 무뎌지기 전이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그를 만나면 어떤 말부터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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