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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승범 Jan 01. 2016

우리는 왜 지휘자를 잃어야하는가

서울시향 논란에 부쳐



우리는 왜 지휘자를 잃어야 하는가
2014년 1월 2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올드 랭 사인'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홀의 공기는 슬픔과 아쉬움으로 자욱했다. 떠나는 젊은 지휘자의 엷은 미소를 뒤로 슬픈 표정에 눈물을 흘리는 단원들의 모습을 마주했다.


그저 착잡함이 가득히 몰려왔다. 버거울 정도로 수많은 스케쥴을 소화하는 악단이었지만, 젊고 신선하며 따뜻한 사운드가 살아있는 악단이었다. 젊은 지휘자, 그만의 색깔이 단원들과의 조화를 바탕으로 막 뿌리내려리했지만 3년 임기로 그저 그는 퇴장했다.

그는 분명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물러나게 되었다. 순수 문화 예술을 지키고, 마땅히 그래야할 집단은 '일괄적'이라는 이유로 유능한 사람을 갈아치워버렸다. 그렇게 찾아가던 색깔은 그저 속절 없이 다시 찢기고 말았다.

오케스트라가 내는 음악에서 개별 단원들의 능력도, 지휘자의 해석과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감이라고 생각한다.
각 섹션 안에서 단원들 서로간, 리더들과 평단원들간, 지휘자와 단원들간, 그리고 관객들과 악단간의 교감말이다. 이러한 교감은 1-2년만에 완성될래야 될 수도 없고, 성장통을 겪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켜켜이 쌓아 올려야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타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 및 단원들을 선발할 때 단원들의 의견으로 선발하는 것이다. 우리 악단과 만나 빛난 색감을 띄게 해줄 사람은 그렇게 뽑는다.


2015년 12월 30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거의 모든 관객이 기립해서 박수를 치고 있다. 난 차마 일어서지 못한채 멍하니 사람들로 가려진 무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공자도 아니고 단원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애정있는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이 눈 앞에 있는데 이를 차마 박수 치며 볼 수 없었다.


본질은 빗겨난채, 타켓을 정한 후 논란의 중심으로 만든 매스컴과 낭자하듯 칼자루를 휘두르며 언론에 흘리는 권력은 내가 그들과 직접 마주하기도 했던 10여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10년간 조금씩 조금씩 쌓아 올렸던 공든탑에 거대한 풍랑을 마주했지만, 이를 지켜줘야할 선주는 눈을 감아버렸다. 선원들은 힘을 모아 그 모진 풍랑에 맞서 싸워보지만 역부족이다. 풍랑 밖에서는 위기에 처한 그 사람들을 그저 호화 유람선에 승선한 사람들로 밖에 보지 않는다.


도데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가? 무엇이 이토록 엉뚱하고도 황망한 결과를 불러왔는가?
정치 권력에 좌지우지되며 갈피도 못잡는 예술 분야를 그나마 일부 자본 권력이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주게 한 국내 예술계이다. 이런 척박한 땅에 그래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사람이 국내에 오케스트라하나를 꾸려보려고 왔고, 사실상 그 사람의 이름 값으로 후원을 받아가며 조금씩 하모니를 만들어갔다.
정상적인 방법이 되질 않으니 굽히지 않아도될 허리를 굽혀가며 그렇게 만들어간 악단이다.


그렇지만 공기관은 어떠했는가? 약속했고, 타당성 결과도 나온 전용홀 건립에 대해서 시의 반응은 미적지근. 이미 티켓까지 다 판매된 북미투어 예산을 삭감해버려 악단의 신뢰도를 확 떨어트린 시의회. 그리고 서울시 산하 소속 단체 사람들이 인권 문제로 고통받고 언론의 무차별적 공격을 당함에도, 결국 눈을 감아버린 이번 행태까지.
결국 정치권력은 그것이 좌든 우든, 그들이 무식하든 박식하든, 문화예술을 가꾸고 지킬 생각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시향의 성과,
그리고 위축될 위기의
국내 클래식 시장


이번 사건으로 국내 클래식 시장은 분명 위기에 처할 것이다. 서울시향이 가지는 여러 성과들과 역할들이 많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나는 가장 첫째로 클래식 시장의 지평을 열었다는 것을 뽑고 싶다. 내한 공연에만 주목 받던 일변도에서 벗어나 문턱을 낮춰 많은 시민들이 접할 수 있게 만든 점은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를 통해 다른 오케스트라, 독주자 들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지게끔 만든 그들이다.
서울시향을 접한 후, 클래식 음악에 흥미를 느낀 이들이 이후 꼭 서울시향이 아니더라도 KBS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의 공연으로 발걸음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국내 악단들도 서울시향에 일정부분 자극 받아 더 나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공연장을 가본 사람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을 때와 없었을 때 연주가 어떠한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젊은 관객 비중이 높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역할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르게 음악을 접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이제는 세계 유수의 단체가 고가의 티켓값으로 공연을 하더라도 서울시향의 연주와 비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일정 파트에서는 우리 시향 연주자가 더 낫다는 의견들도 종종 들어볼 수 있다.
또한, 국내 독주자들의 성장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최근 가장 주목 받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10대 때 이미 정명훈/서울시향과 협연을 했으며, 국내 다른 젊은 연주자들도 시향의 발전과 함께 하며 본인들의 커리어에 당당히 서울시향과 협연 경력을 명기했다. 반주하는 악단이 협연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겠다.



국내 우수 연주자도
오케스트라로


서울시향의 잘 언급되지 않는 긍정적 성과가 나는 우수 실력을 가진 이들이 이제는 '오케스트라' 입단에도 눈을 돌린 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야에 상관없이 국내 교육이라는 것이 워낙 성과주의, 스타 양성주의이지 않는가. 게다가 태생적으로 후원이 생명인 예술계에서 걸출한 실력을 가진 연주자들은 '솔리스트'에 집중을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서울시향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뛰어난 국내 연주자들도 오케스트라에 들어올 수 있음을 증명해보였다. 물론 정명훈 감독의 존재가 입단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 안에서의 조화로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프로필의 단원들이 존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독주자가 주는 아름다움도 있다. 그렇지만, 뛰어난 100명이 넘는 단원들이 관객과 교감하며, 하나의 따뜻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을 마주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 든다.


이런 서울시향의 공든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린다면? 끔찍하고 그렇게 믿고 싶지도 않지만 위축의 위기임은 부정할 수 없겠다.



내 고장 오케스트라


나는 프로 축구 수원 블루윙즈의 오랜 팬이다. 사실 수원에서 산적도, 공부한적도 없지만 그들의 축구가 좋았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원까지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했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 레알마드리드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즐비한 이들의 플레이를 안방에서 즐길 수도 있었지만, 엔돌핀 다이돌핀 할 것 없이 온갖돌핀들이 일어서는 것은 현장,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였다. 호날두도 좋고 카카도 좋았지만, 내 구단인 수원에서 뛰는 염기훈이, 백지훈의 플레이를 직접보는 것이 더 좋았다.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대가 좋아져서, 베를린 필의 모든 공연은 랜선을 통해 안방에서 즐길 수 있으며, 유튜브에는 시간을 초월한 유수의 공연이 올라와있다. 그럼에도 내가 공연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보다 직접 음악을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감동은 전파나 랜선을 타고 전자신호 변환을 거쳐 귓가에 들어올 수도 있지만, 쟁쟁히 가슴까지 울려주기엔 모자라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내가 애정하는 악단의 연주자들이 눈 앞에서 힘을 다해 연주하는 시각적 모습까지 더해지면 음악의 감동은 배가 됨이 분명하다.



시민이 단원들을,
그리고 시향을 지켜야


사건이 터지고 전대표가 기자회견을 한다기에 그런식으로 프레임을 몰고 갈 것으로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가 이렇게까지 갈 것이라고는 사실 예상하지 못했다. 정명훈 감독도 아픈 자식을 떼어놓는 듯한 아픔이 있겠지만,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해버렸다. 그렇다면? 이젠 '아픈 자식'이 정말 걱정이다.

지난달 28일 비가 조금씩 내리던 밤, 굳은 표정으로 콘서트홀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시향 단원들이 시민들에게 호소문을 나눠주고 있었다. 무대뒤에서 튜닝도 하고, 연주 전 휴식도 취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침몰 위기의 배를 구하기위해 관객들을 향해 SOS를 치고 있었다. 언론사들은 정감독의 마지막 공연이라며 여기저기 취재를 했고, 한 수석님은 공연이 채 10여분 남은 상황에도 연달아 방송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 안쓰러운데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허탈한 마음에 고개만 숙인채 한 구석에 있었야만 했다.

앞으로 서울시향 공연 기획에 있어서 난관이 예상되며, 당장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과의 계약 갱신도 어려워 보인다. 객원 지휘, 객원 단원들의 섭외도 지금과 같긴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믿고 싶지 않지만 단원들의 이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훌륭하신 몇몇 문화평론가(?)들은 본질은 배제한채 철학과 음악을 들먹이며 주문과 충고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한 글을 써댈테고, 몇몇 전공자들도 치기어린 원색적 비난을 가할지 모른다.

정감독의 출국으로 이 건은 점점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질 것이다. 정감독에 대한 옅어지는 시선이 시향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질까 걱정이다.

공공기관도, 언론도 그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관객이 시민이 그들의 편에 서줘야한다.
시위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자보를 쓰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 처럼, 단원들을 믿고 콘서트 홀로 발걸음을 향해주는 것, 이것이 풍랑에도 배를 지키려는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좀 더뎌도 된다, 잠깐 후퇴할 수도 있다.
관객이, 시민이 믿음을 준다면, 지금처럼 따뜻한 소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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