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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이 Oct 26. 2023

너무 늦은 나이가 있을까?

2023년 10월 26일, 훤이가 수이에게


2023년 10월 26일


입사한지 한 달, 

새로운 회사에서 쓰는 편지


by 훤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나를 찾아가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언제인 걸까?


요즘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어. 원래 교육산업에서 전략 관련 일하고 있었고 성과도 잘 내고 있었어. 근데 승진도 하고 담당하는 팀원들이 조금씩 생기다 보니 팀원들에게 전달할 경험이나 지식이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고 팀의 방향을 설정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했어. 


한 번은 상사가 “전략이 뭐라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갑자기 멍 해지면서 스스로 답을 못 내리겠더라고. 전략 관련 일을 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못했을 때 “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시간이 흐르고 사번이 상대적으로 앞쪽이라 이 자리에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에 조금 자괴감이 들었지.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 생각했던 내가 그냥 안주하고 있는거구나, 라는 판단이 든 순간 산업도 직무도 모두 바꿔야겠다는 결심이 섰어. 


그 이후로 산업을 두 번 더 바꾸고 이전 커리어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직무도 찾기 시작했고, 도전하고 싶은 직무에 대한 확신이 생겼을 때 휴직을 하고 교육을 들으며 이직 준비를 시작했어. 


결론적으론 새로운 산업에서 새로운 직무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커리어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아직 회사에 적응하고 있는 시기이고 이 직무가, 이 회사가 나와 잘 맞는지 판단하기에 너무 이르긴 하지만, 일단은 내가 원하는 산업에서의 직무 전환 자체는 ‘해냈다’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고 감사하게 생각해.


커리어적으로 이러한 도전을 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어렵지 않았지만 막상 마지막에 면접을 보고 이직을 할 즈음이 되니 주변에서 여러 가지 조언들이 들렸어. 좀 많이 혼란스러웠지. 


30대 중반이면 자신의 전문성을 어느 정도 가지기 시작할 때고 보통 회사에서는 중간관리자나 그 이상급의 위치, 커리어의 방향성보다도 그 깊이감을 다지는 시기인 것 같더라고. 근데 새로운 곳에서는 이전 경력을 100% 인정받지도 못하고 그 때문에 연봉도 깎이면서 들어가는 건데, 직무 전환자에게는 당연한 처우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서웠던 것 사실이야. 


주변보다 뒤처지는 느낌을 받을 텐데 난 그걸 버틸 수 있을까? 괜찮을까? 


거기에 더해서 딱 그 시기에, 이전 회사들 중 한 곳에서 다시 돌아오라는 제안이 있었고 연봉 조건도 훨씬 좋았지. 그런 제안을 받으니 현실적인 고민이 더욱더 깊어졌어. 도전적이었던 과정과 비교했을 때 최종 결정 앞에 선 나는 갑자기 너무 소심해졌어.


안정적. 30대 중반이면 삶이 안정적이어야 하는 것 아니야? 커리어도, 가정도, 경제적으로도 다방면에서. 아니 최소한 20대 때 내가 생각하는 30대 중반은 그래야 하는 것 같았고 현재 내 친구들을 봐도 (일반화하기에는 아주 작은 모수이긴 하지만) 모두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일도 큰 욕심 없이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거든. 물론 그들의 속 사정을 내가 다 알진 못하겠지?


<이전 직무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커리어와 연봉 수준을 유지한다> VS <연봉을 깎고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장담할 수 없는 미래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이렇게만 보면 정답은 너무 명백했어. 물론 앞서 말했듯, 커리어적 도전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분명했지만, 다들 일은 그냥 일이라 생각하고 마음에 안 들어도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거 아니야? 그게 어른 아니야? 


나만 어른이처럼 일 속에서의 ‘꿈’, ‘삶의 의미’를 논하면서 새로운 것만 찾으려고 하는 모습이 철없어 보이더라고… 또 괜히 안정적인 것은 버리고 인생의 풍파를 스스로 만드는 느낌? 지팔지꼰(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의 정석을 내가 보여주고 있는걸 수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나를 찾아가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언제인 걸까?


근데 난 아직 새로운 일이 재미있고 매일 하던 그 일이 그립지 않아. 결혼 준비 하고 신혼집 이사하면서 매일 8시간씩 듣던 교육도 너무 힘들었고 그 사이 몇 번이나 받은 탈락 이메일도 상처였지만, 도파민 중독인진 몰라도 돌이켜 보면 그 과정이 재미있었고 아직은 인생이 조금 흥미롭고 다채로웠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내가 패러글라이딩을 했잖아? 항상 ‘해볼까?’ 고민만 했던 액티비티였는데 직접 해보니까 ‘해보지 않으면 절대 느끼지 못할 이 느낌을 난 왜 모르고 살았을까?’ 싶더라고. 이런 경험들을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인생 여기저기 뿌려져야 좀 살맛이 날 것 같은데…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기엔 내가 아직은 너무 철이 없나 봐. 


근데 매일 평일 9-6 내가 임해야 하는 일이 새롭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겠어! 긴장감과 새로운 배움의 연속이 될 텐데… 뇌가 조금 더 번뜩이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


너는 30대 중반에 아예 새로운 나라에 삶의 터전을 잡게 되었잖아. 나보다도 더 안정적인 한국 대기업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휙 떠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결정들 속에 너는 어떤 고민들이 있었니? 


너도 나랑 같은 도파민 중독이니?


2023년 10월 26일, 

훤이가 수이에게





메인 사진에 대한 추가 설명

훤이가 보낸 새로운 오피스 인증샷으로, 칫솔치약 컵, 티백 2개 담긴 2L 물 통, 비타민, 테이크아웃 잔, 간식, 아이패드, 거울, 버티컬 마우스, 책상 아래 쿠션과 슬리퍼까지... 완벽한 K-직장인 책상의 면모를 볼 수 있다 / by 수이


인증샷 속 훤이 양말이랑 구두가 매우 앙증맞은 관계로 따로 이렇게 올려봅니다 / by 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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