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8일, 수이가 훤이에게
2024년 2월 28일
by 수이
훤이 니가 물었지. 30대 중반이나 되어서, 아예 새로운 나라에 삶의 터전을 잡을 결심을 어떻게 한 거냐고. 부부가 안정적인 한국 대기업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결정 속 어떤 고민들이 있었냐고.
우린 한국이 싫어서 미국에 나온 게 아니잖아. 한국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지난 10년간 직장 생활하며 쌓은 소중한 인연들이 있고, 익숙한 잡 마켓이 있고, 멋진 커피집들이 있고 (응 미국 커피 맛없어)... 한국에서 정착하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야기해 보면 나도 남편도 꽤나 즐겁게 살았겠다 말해.
돌이켜보면 미국에 올 결심을 하게 된 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나에게는. 대외적으로는 남편이 미국에서 박사를 하게 되어 같이 오게 되었다고 말해왔지만. 정말 솔직하게는 내 마음건강을 챙기려고 미국행을 결정했다는 생각이 이제는 들어.
한국에서 치열한 20대를 보내고 정신 차려보니 30대 중견 직장인이 되어 있더라고. 한국 사회가 어른에게 으레 기대하는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도 꾸렸지만. 회사에 앉아 있으면 뭐에 맞은 것처럼 섬뜩할 때가 있었어. '나, 차장이야?' 신입 때 내가 일했던 차장님들과 같은 레벨의 직장인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집에서 티비를 보다 문득, '나, 벌써 결혼한 지 꽤 됐네?' 깜짝 놀라기도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정도 지나면, 아무래 매일이 다이내믹해도 어떤 익숙함이 드리워지는 것 같아.
그래서 새로운 나라에서 도전해보고 싶었어. 미국에서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가는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질 것 같아서. 뻔뻔한 선택을 해본 거야.
엘에이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얘기가 있어. (우스갯소리지만, 동시에 꿈이 파괴되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여긴 나이, 배경을 불문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엘에이에 살며 도전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는데. 그중 생각나는 몇 명을 소개해볼까?
한국에서 유명 K-드라마 프로덕션 회사를 설립하신 J 이사님은, 사업을 확장하는데 거침이 없어. 그녀의 목표는 할리우드 진출. 같이 밥을 먹으면 에피소드를 여럿 풀어주시는데,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셔서 시간 가는 줄 몰라. 요즘 콘텐츠 시장 지각변동이 크고 할리우드에서도 작가들, 배우들 파업하고 난리거든. 내가 J 이사님이었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이 두려웠을 것 같아. 그런데 이사님은 오히려 변화를 기회라고 보시더라고.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멋진 분이셔.
필름스쿨에서 만난 미국 아저씨 M은 팟캐스트 제작자야. 오디오가 전문인데, 영상 쪽으로 비즈니스를 확장하려고 필름스쿨에 등록했대. M은 전문분야인 오디오 관련 지식을 학생들 뿐 아니라 교수들에게도 열심히 전파해. 수업의 이론적인 부분을 현업에서 적용할 때 생길법한 이슈도 열심히 제안하고. 아들이 이십대라고 했으니까 M은 오십은 되었을 것 같은데. 반에서 나이뿐 아니라 열정도 가장 많은 것 같아. 3년 뒤, 필름스쿨에서 배운 것들을 가장 잘 써서 사업적으로 성공할 것 같은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M을 선택하겠어.
엘에이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교포 A는 나랑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야.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파이낸스 일을 한 엘리트. 코비드 때 직장에서 잘린 다음에는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다 패션 쪽으로 틀었대. 지금은 엘에이의 편집샵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밤에는 아트스쿨에서 기본기를 익히며 패션 디자이너 자격증을 따기 위한 코스워크를 듣고 있어.
이 사람들 외에도 여기서 만난 친구들, 동네 사람들, 코리아타운에 터전을 잡은 한인들 중엔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미국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인종 국가이고, 이민정책이 오픈되어 있는 나라인 게 클 거야.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모였고, 타지에서 미국으로 왔으니 뭐라도 도전해 봐야 살지 않겠어?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면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이곳에서 지내며 미국 사회 자체가 도전하지 않으면 밀려나가는 구조라는 생각도 들어.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엘에이는 좀 더 그런 경향이 심한 것 같기도 해.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물론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부분들도 있겠다, 싶은 것들 몇 가지를 한번 적어볼게.
미국에도 유리천장은 존재해. 매니저급은 어느 인더스트리를 가나, 이민자보다는 미국인이, 유색인종보다는 백인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대다수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어. 미국이라고 아름답지도, 완벽하게 평등하지도 않아.
하지만 그래도 무슨 일을 할 때, 미국은 능력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한국보다는 강해. 끊임없이 뭔가를 보여주고 증명해야 살아남아. 한국 기업은 사람을 쉽게 자르지 못하잖아. 여기는 layoff 가 일상이다 보니 잘리면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직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한국 회사는 시간이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 선골이라는 말 알지? 회사 몇 년 다니면 기댈 구석이 생기잖아. 난 첫 회사는 공채입사를 했고, 이직하고는 경력입사자가 되었었는데. 해보니 공채 입사가 적어도 회사 내 입지 면에서는 편리하다는 생각을 해. 요즘은 한국도 공채가 많이 사라졌지만, 공채로 입사해서 승진 루트를 차곡차곡 밟고 올라가는 게 무시할 수 없는 엘리트 코스였던 것 같아. 경력입사자들은 본인의 능력을 더 적극적으로 회사 내에서 보여줘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고.
미국에는 공채가 없어. 윗사람이 필요한 아랫사람을 뽑거나 특정 포지션에 알맞은 입사자를 찾아. 모두가 경력직이다 보니 회사는 방패라기보다는 배틀그라운드. 불안한 만큼 안주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어.
코비드 때 틱톡 댄스 챌린지가 유행했었잖아. 웃긴 게 미국 아빠들은 딸들이 핸드폰 앞에서 춤추는 거 보고 자기들도 해보고 그런다? 한국에서 청소년기의 딸을 둔 아빠가 틱톡에서 춤추고 있으면 주변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쯧쯧거리지 않았을까. 미국인들은 나이 들었다고 체통을 지키려고 하진 않아.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라는 것도 딱히 없는 것 같고.
그건 어쩌면 슬픈 이야기지만 미국엔 나이가 주는 프리미엄이 없어서라는 생각도 들어. 한국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대하는 문화가 있잖아. 반박도 조심스럽게 하고, 단어도 좀 골라 쓰고. 그런데 미국은 나이가 들면 얻는 것보다는 챙길 것만 늘어나는 느낌. 아는 것도 더 많아야 되고, 돈도 더 잘 벌어야 하고, 말 안 듣는 젊은 애들 눈치도 봐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 거기다 나이를 내세우기 어렵다 보니 열심히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들한테 밀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도전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동전에는 늘 양면이 있잖아? 미국은 도전에도 나이제한이 없어. 40대에도 직업학교 가서 코딩 공부하고 새로운 분야를 시도하는데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이렇게 사람이 몇 살인지에 매이지 않게 되면서, 도전이라는 게 필요하고 또 가능한 것이 된 것 같아.
한국에서 일했을 때 얘기인데. 너도 알지만 나는 아이디어를 피칭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했었잖아. 근데 그때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 있었다? “이거 한번 해보고 싶은데 어때요?” “제 생각엔 이게 좋은데 어때요?” 이런 말을 해서 잘 된 적이 없었어. 대부분 반응이 이렇게 나오거든. “니가 뭔데 너 하고 싶은걸 해?” 특히 윗분들께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최악이야. “니가 뭔데 좋고 나쁜 걸 결정해?”라는 생각을 하시니까.
내가 선택한 방법은 “우리 이거 안 하면 안 된대요." "어쩔 수 없이 이거 꼭 해야만 된대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거였어.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점을 부각하면 대체로 쉽게 오케이가 나더라고.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1) 우리를 위해 (공동체 의식) 2)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헝그리정신) 3) 뭐가 됐든 한다 (까라면 까는) 마인드가 있는 걸까.
흥미로운 건 미국은 정반대라는 거야. 여기 사람들한테 “우리 이거 해야 된대”라고 하면 “누가, 내가?”라고 반문부터 해. 그러고 나서는 “그걸 왜 네가 정해?”부터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그럼 네가 하던지” 등등… 한국에서는 마법처럼 닫힌 문을 열어줬던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이> 같은 단어들이 절대 먹히지 않아. <우리>를 운운하려면 우리가 누군지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니까.
솔직히 나는 이런 식의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좋은지는 의문이야. 미국이 기후 변화와 같이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분야에서는 계속적으로 뒤처지고, 총기를 보유하고 정치가 양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 중에는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식의 정신이 큰 것 같기 때문이야.
하지만 동시에 여기 사람들 사이에는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는 일련의 활동들이,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하는 일처럼 여겨져.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본인 가슴 뛰는 일에 진심이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온갖 도전을 감행하지. 공평한 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한 만큼, 남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도 관대해. 누가 “나 이거 진짜 해보고 싶어”라고 하면 "네가 뭔데?"가 아니라 “그래 한번 해서 보여줘 봐!”라는 반응이야.
그래서 나는 생각해. 미국에서 닫힌 문을 열어주는 마법의 단어는 <나의 도전>이라고.
어쩌다 보니 지난번 편지부터, 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네. 지금 내게 중요한 문제라서 그런가 봐.
미국에서 도전하는 마음에 대한 편지는 이쯤에서 끝내도 좋을 것 같아.
어쩌다 도전을 하게 되었는지, 도전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미국과 한국에서의 도전이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는지... 이런 것들을 너에게 이야기하며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이제는 제대로 도전을 해 봐야지.
훤이 니가 느끼는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과 사람들의 분위기도 궁금하다. 어쩌면 미국보다도 빠르게 매일매일 변하고 있는 한국에서 니가 요즘 느끼는 것들은 뭐가 있는지 얘기 좀 해줘.
2024년 2월 28일,
어느새 햇살이 따가운 엘에이에서
수이가 훤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