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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수미 Mar 02. 2024

향수 탈덕기

기억을 지우고 있다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지만 향수에 처음 홀리게 되었던 날은 꽤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2009년 말, 아마 무슨 기자간담회거나 드라마 제작발표회 같은 곳이었는데 타사 남자선배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사각 유리병을 흔들며 말했다. "나 고현정에게 향수 선물 받았어!" 인터뷰 중에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향수 뭐 뿌리는지 물어봤더니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더니 가지시라면서 선뜻 병째 건네줬다는 거였다. 그게 딥티크의 필로시코스였다. 

 엄마와 언니의 화장대 위에 쁘아종, 인칸토 같은 향수들이 있었지만 내게는 너무 달고 진한, 그리고 인공적인 느낌이라 별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향수에서는 뭔가 풀과 과일과 꽃을 함께 짓찧은 것 같은 냄새가 났다. 당시에는 몇 군데 없던 딥티크 매장을 일부러 찾아가서 '이렇게 비싼 걸 사도 되나' 싶은 마음을 누르고 당장 필로시코스를 구매했었다. 그것이 나의 첫 향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필로시코스 앞에는 '고현정 향수' 수식어가 바로 붙었다. 고현정 배우의 호쾌한 성격이 묻어나는 일화인 것인지, 고도의 입소문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을지 궁금하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이라면 너무 천재적이다.) 

 그 이후로 1~2년에 한 병 정도씩은 종류를 바꿔가면서 샀다. 아침에 뿌리면 하루 종일 은은하게 기분이 좋으니까 비싼 값 충분히 한다고 생각했다. 출근하기 싫어도 아침에 옷을 꿰차입고 거울 앞에 서서 향수를 뿌리면, 그만큼 자신감이 충전되고 하루를 새로 시작할 에너지도 얻는 기분이었다. (돈을 스스로에게 뿌리는 셈이니까?) 문제는 코로나 시국에 발생했다. 집에만 있으니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괜히 잘 때도 뿌리고 자고, 혼자 있어도 아침 저녁으로 다른 향수를 뿌렸다. 우디향 종류별로, 그리너리한 것 종류별로 모으다가 20개 넘게 쌓아두기에 이르렀다. 

 다 '당근' 때문이다. 모 취재원이 '향수 좋아하시면 당근마켓 잘 이용해보시라'고 툭 말을 던졌는데, 과연 들어가서 검색해보니 정가의 거의 반값에 중고품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향수 특성상 취향에 안 맞으면 아무데도 쓸 수 없는 물품이기 때문이다. 숨겨진 보물찾기를 하듯, 혹시 좋은 가격에 나온 매물이 없나 수시로 검색하곤 했다. (중고 거래는 가급적 직거래로, 한글 상표가 붙은 걸로 하는 것을 추천드린다. 가품이 많다.) 

 그랬는데, 향수를 정리하고 있다. 당근에 팔 수 있는 것들은 팔고 있고, 라벨에 이름이 새겨져서 팔기 곤란한 것들은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향수의 성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란과 우려가 있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약간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차원이다. 특정 시기마다 특정 향수를 집중적으로 뿌렸다. 이거는 어디 출입할 때 뿌렸던 것, 이거는 선거TF 시기에 뿌렸던 것, 이거는 어디 출장갔을 때 샀던 것... 그래서 각 향수마다 일과 관련된 기억이 녹아있다. 그런 기억을 내다 팔고, 지우고 있다. 

 당근에 매물로 내놓은지 거의 넉 달만에야 구매 입질이 와서 거래 약속이 되고, 기뻐서 적는 향수 탈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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