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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Mar 17. 2021

봄을 맞이하는 자세

봄이 한껏 다가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은 이렇다. 첫째는 평소와 같은 출근길,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데 갑자기 콧구멍 속으로 답답한 공기가 쑥 빨려 들어왔을 때. 먼지가 가득해 두터운 무게의 공기지만 온화한 햇살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암시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청량하고 시원한 커피가 간절해질 때. 원두의 향긋함은 겨울보다 봄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거리마다 가득한 사람들의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릴 때. 한껏 예민해졌던 마음을 순식간에 누그러지게 만드는 힘은 봄뿐이 지녔다고 믿는다. 아무 이유도 없다. 소음으로 들리는 데시벨 높은 소리보다 아이들이 뛰놀며 내는 명랑한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와 닿는다.

J와 S를 만난 주말은 봄을 느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날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생 시절 대외활동인 기자단을 하며 만났다. 단순히 같은 나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그것보다, 좋은 글을 쓰고 내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묶어줬다. 그래서인지 이들을 만날 때면 일상에 치여 잊고 있던 영감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우리는 성수동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J와 S는 요즘 뜨고 있거나 맛있기로 소문난 핫플레이스를 잘 안다. 반면 나는 새로운 곳보다 익숙한 곳이 편한 터라 활동반경이 좁다. 아마도 애인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아서 조금 슬프다. 이 날 역시 두 사람의 의견으로 한 태국 음식점에 갔다. 향이 강렬한 이국적인 식재료를 잘 소화하는 친구들을 곁에 둔 건 행운이다. 그린커리는 한 술 뜨자마자 행복한 신음을 내뱉게 만들었다. 예쁜 나무 식기에 담긴 파인애플 볶음밥과 팟타이 덕분에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묵혀뒀던 여행의 기분이 상기됐다. 나무 바구니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인기스타, 사장님의 반려견은 모두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밥 숟가락질 한 번, 얼른 강아지 보기 한 번.

점심 후 카페는 필수코스이지만 봄, 그리고 주말의 성수동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직 조금은 남아있는 찬 바람에도 밖으로 뛰쳐나와 얇은 옷을 꺼내 입고 싶게 만드는 따뜻한 분위기였다. 커피 못 마실 걱정은 필요 없다는 카페왕국 성수동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동네를 몇 바퀴 빙빙 돌던 우리는 결국 커피를 사 서울숲 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런 날씨에는 그저 길을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래서 광합성이 정말로 필요하다.

J와 S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외출이 조금은 귀찮았다. 몸과 마음을 전부 소진한 요즘, 휴일은 무조건 집에서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않고 넷플릭스만 보며 은둔자처럼 살았다. 하지만 편한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보며 느긋하게 정처 없는 걸음을 하고 있자니 지난날들이 후회됐다. 그래,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행복을 내던졌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터널을 나오는 순간 쏟아지는 빛은 언제나 순식간이고, 언제나 놀랍다.

다행히 넓디넓은 서울숲에는 우리에게 허락된 자리가 있었다. 제대로 앉아 커피를 쭉쭉 마셨다. 적당한 산미와 깔끔한 뒷맛이 어우러진 아이스 드립! 날이 포근해지는 봄에는 묵직하거나 달콤한 커피보다 청량한 빛깔과 향이 돋보이는 드립커피를 찾게 된다. ‘남타커(남이 타주는 커피)’인 것도 한 몫했지만, 세 명의 만장일치 추천으로 간 카페의 커피인 만큼 확실히 양이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의 맛이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각자의 근황을 나눴다. 정확히는 ‘요즘 뭐 하고 사는지’보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가까운 이야기다. J는 배우 윤여정의 인터뷰 영상을 인상 깊게 봤다고 했다. 전 국민이 아는 유명 배우에서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는 낯선 미국 땅에서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또 한 번 바닥부터 올라왔을 그. 기구한 인생이라며 웅성대는 손가락질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하며 매몰되지 않은 그. 우리는 윤여정 배우처럼 늙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S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정말 잘 해내고 싶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주도적으로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전 직장에서도 같은 부서로 있었지만 이 회사는 다르다고, 궁합이 맞는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이 본 타로카드의 내용과 부합한다고 말했다. 전화로 점을 보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사실 나도 팔자라는 게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일복이 많은 나는 언제 어디를 가도 항상 많은 일거리를 떠안았고, 늘 모든 것을 소진하며 일에 임했다. 이게 스스로의 선택인지 팔자의 흐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이들에게 일하느라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했던 걸 보면 언제나 비슷한 모습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럴 때마다 J와 S는 나에게 용기를 줬다. 공감 없는 가벼운 위로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진심을 담아 “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진지한 응원은 삶을 바꾸어 놓는다. 두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 지보다 그간 얼마나 대단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기억하게 된다. 그녀들은 그 대단한 것들을 잊고 무력함에 침전된 한 사람을 건져 올린다. ‘내가 구해준 거 아닌데? 너가 대단해서 여기까지 올라온 거지’하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의 삶이 뿌듯해진다.

이미 다 마신 커피잔을 쥔 채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또렷한 무지개가 생겨났다. 우리는 감탄하며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어디선가 툭툭 튀어나온 길고양이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장난을 쳤다. 옆 자리에 앉아 통화를 하던 여자가 꺅꺅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채로 연신 고양이 사진을 찍는 바람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으헝헝, 어떡해. 너무 귀엽다”
“저분은 고양이를 엄청 좋아하나 봐”
“저기에 맥주캔 있잖아. 저것 때문은 아닐까?”

신기하게도 지금으로부터 딱 1년이 되기 하루 전, 나는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어리석게도, 어쩌면 다행히도 매 해의 끝자락을 훌쩍 넘기고 그제야 깨닫게 되는 진리. 어떻게든 봄은 온다.” 사계절 중 ‘겨울’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어리석은 나는 올해도 고비를 다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을 한다. 이제, 봄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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