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秘潭...
" 너는, 너무 깊어서 신비한 우물처럼 다 들여다 보이지 말아야 하고, 한없이 길어 올려도 늘 차고 맑은 너를 간직해야만 해! 그래서 비담이 너에게 주는 호야"
'비담'은 스무 살 그때, 사학을 공부하던 내 첫사랑이 나에게 주었던 시건방진 '호'다.
신비한 연못이라니, 젠장!
눈에 씐 콩깍지를 매일매일 갈아 끼워 장착하고 싶었던 그때의 나는, '비담'이라는 호를 만들어 선물하는 그 사람이 그렇게도 아름다웠고 어찌할 수 없이 좋았었다. 비담이라는 아름다운 음절이 주는 느낌에 매혹되었던 그때의 나는 정말로 함부로 들여다 보이지 않는, 너무 깊어 바람소리마저 소용돌이치다 사라지는 우물이 되고 싶어서, 침잠하는 나를 연습하기도 했었다.
메조소프라노의 저음이 내가 가지고 태어난 음성이라는 게 그래서 좋았고 무대에 서려하면 깊은 우물 같은 생각과 울림을 앞장 세워 노래를 해석했다. 그리고 그러한 진한 느낌으로 나를 던지며 무대를 장악했었다. 첫사랑, 그가 건네준 마지막 꽃다발을 받아 든 것 또한 'che faro senza euridce' 깊은 우물 같은 막막함으로 울어야 했던 아리아를 부른 그 무대에서였다. 거대한 안개꽃 다발을 사이에 두고 이것이 그와 마주 서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었다. 나는 말없이 뒤돌아 무대 뒤로 걸어 들어갔고 바로 10분 전에 부른 아리아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할까'를 주문처럼 외우며 그저 그것으로 끝이 났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므로 이 막막함도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며...
그렇게 첫사랑과 헤어지고 10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방배동 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그 사람은 그러나 비담이 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젠장!!
잊고 싶어서 애써 잊어버린 기억이 가끔 떠오를 때면 코미디의 결말 같은 대사가 툭 터져나온다. 젠장!
이건 아마도 실패한 시간들의 기억이 순간 순간 아프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름 웃으며 기억할 수 있게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혼자 마음을 갈무리 한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 기억들은 잊고 싶은 것과 잊고 싶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다 흐려져간다. 버리고 싶었던 기억도 희미하게 웃음이 되어 있을 테고, 영원히 잊히지 않기를 바랐던 기억도, 순간을 사로잡은 깔깔거리던 기쁨도 다 무엇이었는지 흐릿해져 기억 한 구석에 쑤셔 박혀 있기 일쑤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고 이틀 뒤, 작가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온라인에서는 글을 잘 쓰지 않던 나는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에 흠칫거려야 했다. 기쁨보다는 부담감으로 여기저기 쿵 쿵!! 갈등이 머릿속을 부딪히며 돌아다녔다. 무엇을 쓸까, 어떤 방식으로 폼을 만들어야 하나, 복잡하게 흔들리며 브런치를 둘러보다 이틀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동그라미로 장식한 첫 페이지의 저들처럼 내가 이런 좋은 글들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여기 끼어있는 게 맞는 것일까? 갈등하는 사이 '비담'이라는, 너무 오래돼서 이제는 흔적뿐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秘潭... 깊은 우물처럼 너무 들키지도 말고, 너무 침잠하지도 말고 차고 맑은 물을 길어 올리듯 천천히 글을 써보자. 내 기억의 무엇과 지금의 나를 하나하나 꺼내다 보면 나 또한 아름다운 글을 쓰고 있겠지. 거기 또 하나 새로운 내가 살고 있겠지....
그렇게 시작하는 첫,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