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은 May 15. 2021

아이 엠 러브

루카 구아다니노가 연출한 '아이 엠 러브'는 고전의 탐미적 붓체로 정물을 벗겨냅니다. 온화한 조명 아래 생기도, 감정도 없이 놓인 인물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무정물 덩어리로 느껴집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모양 그대로 그려낸 삶이 없는 정물화 그 자체이지요. 그러나 '아이 엠 러브'는 그 시점의 견고한 아름다움에 머무는 작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균형을 깨고 액자를 탈피할 수 있는 초월적인 열망으로 질주하지요. 예술작품 같은 포스터 속 세 명의 여인들에게 입혀진 색이 그렇습니다. 그중에서도 빨간 드레스의 엠마는 정물화의 조화와 안정성을 깨는 충동과 생기로 가득 차 있지요. 다시 보니,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결의에 차있습니다. 아주 작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된 일깨움이 한 사람의 영혼을 뒤흔드는 순간의 광휘는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되찾은 실존이 비극적인 운명과 대적할 때 오는 비장함은 얼마나 아름다운 가요. 


겨울의 밀라노. 러시아 출신 엠마(틸다 스위튼)는 전통 어린 섬유재벌 레키 가문의 아들 탄크레디와 결혼한 재벌가의 며느리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다. 그녀는 레키 가문을 일군 장본인이자 지주인 시아버지의 생신을 준비하고 레키 가 사람들이 속속 저택으로 모인다. 가족들이 엠마의 둘째 아들 에도아르도(플라비오 파렌티)가 경기에서 진 이야기를 나눌 때 엠마는 섬세하고 다정한 손길로 파티를 준비한다. 화목해 보이는 식사 자리는 순조롭지만 막내딸 엘리자베카(알바 로르바케르)가 준비한 뜻밖의 생신 선물이 레키 가문에 미묘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리고 엠마의 시아버지가 레키 가의 후계자로 아들 탄크레디와 손자 에도아르도를 공동으로 지목하자 가족들 사이의 긴장감이 서서히 증폭된다. 견고한 레키 가를 흔드는 변화는 엠마의 삶에도 침투한다. 고향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과 성장해 곁을 떠나는 아이들이 남긴 허무가 해일처럼 몰려와 엠마의 완벽한 삶을 뒤흔든다. 그중 엠마는 아들 에도의 친구이자 요리사인 안토니오(에두아르도 가브리엘리니)를 만나 그의 음식을 맛보면서 삶의 기쁨과 다시 마주하는데. 그녀의 허기가 채워지는 순간 잠든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정물화 속의 여자, 엠마

엠마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녀는 레키 가의 영원한 이방인입니다. 그녀는 러시아 예술품 복원가의 딸로 작품을 수집하러 온 탄크레디와 만나 결혼해 밀라노로 왔지요. 탄크레디가 지어준 엠마라는 이름은 그녀가 기억하던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녀가 구사하는 러시아식 이탈리아어가 그렇습니다. 뿌리를 잃은 그녀가 온전히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상실된 것이지요.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엠마의 언어는 주변을 맴돌 뿐 중심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엠마는 아들 에도와 나누는 짧은 러시아어와, 에도가 좋아하는 러시아식 수프 '우하'로 자기 상실감을 달랠 뿐입니다. 엠마를 더 외롭게 하는 것은 레키 가문의 벽입니다. 거대하지만 건조하고, 단일 쇼트로 잡히는 집안의 좁은 공간으로 몰린 엠마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영화 초반 그녀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방으로 올라가 커튼을 닫지요. 아들 에도의 파티에 바깥이 궁금해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여닫이 문은 엠마를 격리시키고 그녀를 좁은 방으로 내몹니다. 이러한 공간 설정은 레키 가문의 안주인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인 엠마가 겪었고 겪어야만 하는 외로운 이방인의 삶을 묘사합니다. 


엠마의 시어머니는 에도의 약혼녀에게 주라며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를 건넵니다. 이는 레키 가문의 며느리에게 전해지는 전통이지요. 조르조 모란디는 한평생 정물화만 그린 이탈리아 화가로 그는 같은 소재의 유사한 구성을 반복하며 미묘하게 변주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엠마의 삶 그 자체이며 레키 가문의 며느리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그들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고요하게 벽에 걸려있다 한 여인에게서 다른 여인에게 주어지지요. 레키 가에는 수많은 예술작품이 걸려있지만 그들이 주목받는 건 단 두 순간뿐입니다. 영화 초반에 탄크레디가 엠마에게 결혼 선물로 준 한 여인의 정물화를 두고 방문객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과 지금 이 장면이 그렇습니다. 이 두 장면은 엠마와 에도의 약혼녀를 실체화 하기를 거부하는 레키 가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과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생명력이 없는 그림과 대면하겠다는 잔인하고도 가혹한 태도이지요. 또한 오직 벽에 걸려, 간간히 살펴봐지는 소모품으로 남아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합니다. 


열망의 도화선과 마법 같은 순간 

엠마의 결핍이 녹녹하게 연출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엠마는 에도의 옷을 찾으러 갔다 베카가 에도에게 남긴 편지를 읽게 되지요.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밝히는 베카의 독백이 일상을 잃고 두오모 성당을 오르는 엠마 위로 겹쳐집니다. 엠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쓰인 편지를 잡은 채 하늘을 관망합니다. 엠마를 뒤흔든 건 딸의 커밍아웃이 아니라 사랑이 주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베카의 용기와 열정이었지요. 이제 밀라노는 햇무더기 아래의 베카와 오버랩되며 여름으로 넘어갑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베카가 엠마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말합니다. 그 순간 엠마의 표정은 자애와 동경, 그리고 자기 연민으로 유연하게 연주되지요. 베카의 말처럼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그러니 베카의 환희와 엠마의 속울음이 맑은 하늘의 비가 되어 내립니다. 


이 영화의 중반부에는 마법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안토니오의 레스토랑에 엠마와 시어머니, 에도의 약혼녀가 식사를 하러 갑니다. 안토니오가 엠마를 위해 특별히 내놓은 새우 요리는 엠마의 미각을 사로잡지요. 그 순간 영화는 연극이 되고 조명은 엠마만을 비춥니다.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카메라가 섬세하게 엠마의 얼굴을 훑습니다. 길들여진 정형화된 맛이 아닌 새로운 맛에 눈을 뜨는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순간입니다. 더욱이 그 음식은 자연의 재료로 만들어진 날 것 그 자체였지요. 그렇게 아주 작은 세포 하나에서 시작된 일깨움이 엠마의 온몸을 지배합니다. 이 시퀀스와 함께하는 존 아담스의 음악은 엠마의 욕망을 공간 위로 띄어 올립니다. 공기 위를 부유하는 엠마의 희열이 오르가슴이 되어 스며들지요. 무정물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이 마법 같은 장면은 오직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얻어냅니다. 


자연으로의 회귀와 인간 혁명 

이제 엠마에게도 완연한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여름날, 빨간 드레스로 안토니오와 마주친 엠마는 이제 자유롭고 밝은 옷을 입고 베카를 만나러 산레모로 가지요. 하지만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안토니오는 운명처럼 다가오고 두 사람은 안토니오가 작물을 재배하는 곳으로 향합니다. 깊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자동차 시점의 화면은 이들 사이의 성적 긴장감과 자유를 향한 질주를 의미합니다. 마침내 도달한 자연 한가운데서 엠마는 카디건을 벗고 안토니오는 그녀에게 키스합니다. 사실 이건 뜻밖의 전개가 아닙니다. 베카가 엠마에게 자유의 환희를 보여준 것이 도화선이었다면 거기에 불을 붙인 건 엠마에게 토치로 음식을 달구는 법을 가르쳐준 안토니오였습니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질서의 벽을 깨트린 것은 그의 음식이었지요. 그러니 안토니오와 엠마의 키스는 실수도 충동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무너진 댐은 쏟아지는 물을 막을 수 없고 쏟아진 물은 되담을 수가 없지요. 이렇듯 산레모는 그녀에게 자유의 도시입니다. 밀라노의 우울과 건조함이 무채색으로 그려졌다면 산레노의 엠마는 찬란히 빛납니다.


안토니오와의 첫 섹스 이후 엠마는 참았던 소변을 쏟아냅니다. 그 후 카타르시스에 휩싸여 눈물 섞인 환희를 토해내지요. 그녀는 더 이상 정물이 아닙니다. 자신을 얽매던 모든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엠마는 자연 속에서 안토니오와 사랑을 나눕니다. 붓칠을 하듯 섬세하게 더듬어지는 이들의 나체와 하나 됨은 여름 볕에 들떠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합니다. 푸른 대지의 생명과 활기가 엠마에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요. 이 시퀀스는 재생과 부활을 뜻하는 르네상스적 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은 자유인이며 권위와 억압은 혁명의 대상이었지요. 더욱이 그 시대의 예술은 사실주의적 자연주의 화법으로 삶의 환희와 아름다운 자연을 남김없이 담아냅니다. '아이 엠 러브'는 그 화법을 따라 인물들의 욕망과 자유를 화폭에 수놓습니다. 꽃잎 위의 꿀벌과 곤충들로 삽화된 자연은 충만한 기쁨에 사실성과 생동감을 더하지요. 러시아 복원가의 딸 엠마는 탄크레디의 수집품이었으나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찾고 스스로를 재생시켜 부활합니다. 그녀가 기억 속에 묻어뒀던 본명 키티쉬를 안토니오에게 알려준 것처럼 말이지요. 엠마는 이제 르네상스 인간입니다. 


고전의 미학로 그리는 구 시대의 종말 

또한 '아이 엠 러브'는 구시대의 명예와 전통을 혁명에 가까운 엠마의 사랑으로 전복합니다. 엠마의 시아버지가 지목한 공동 후계자와 죽음으로 표현되는 그의 퇴장은 레키 가문의 균열과 변화를 야기하지요. 탄크레디는 변화하는 세계에 맞춰 가문의 이름을 매각하고 금융회사로 발돋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에도는 자본이라는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명예와 전통에 매달리지요. 그러나 레키 가문의 명예와 부는 유대인 노동자를 가차 없이 부리며 얻은 모순과 해악이 아니던가요. 공허하기 그지없는 전통에 매달리는 에도의 슬픔은 창백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에도는 엠마가 안토니오와의 관계로 어머니가 아닌 여자로 존재하려 하자 분노하지요. 하지만 변하는 세상과 혁명의 파고를 피하지 못한 에도는 비극적인 사고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엄마는 내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에도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엠마의 시아버지와 에도의 죽음은 덧없는 명예와 전통의 몰락입니다. 그곳에서만 의미 있던 엠마의 존재 역시 가족의 무덤에 함께 묻힙니다. 


이탈리아 귀족 가문의 몰락과 해체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표범>을 떠올리게 합니다. 1860년 분열의 시대를 맞이한 이탈리아의 귀족 파브라치오 공작은 자신의 세계가 지는 순간을 응시합니다. 그의 조카 탄크레디('아이 엠 러브' 속 변화를 택한 탄크레디와 이름이 같지요)는 새로운 세계의 거인으로 부상합니다. 파브라치오는 귀족적 가치의 붕괴에 고독히 아파하다 영원의 세계를 찬양하며 어둠 속으로 퇴장합니다. 물론 '아이 엠 러브'의 멜로 서사가 <표범>의 그것과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 엠 러브'가 찬란했던 세계의 풍요와 몰락을 그리는 방식과 그를 포착하는 귀족적 탐미주의는 이탈리아 고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지요. 사실 불륜과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이 영화의 구조적 뼈대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까지 닿아있는 클래식입니다. 그러나 루카 구아다니노는 그 전형적인 이야기에 고전의 풍요와 표현력을 더해 영화의 고전적인 가치, 다시 말해 종합예술로서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게 바로 예술 영화의 가치이고 '아이 엠 러브'의 클래식이 인간 삶에 대한 사색을 일으키는 이유입니다. 


엠마의 죽음과 키티쉬의 부활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에도의 장례식장입니다. 엠마는 넋을 놓고 그녀의 눈동자는 영혼이 떠나간 것처럼 공허합니다. 울지 않는 엠마를 대신해 내리는 비가 고개 숙인 조각상의 얼굴을 적십니다. 엠마는 자리를 떠 성당으로 향하고 탄크레디가 그녀를 따라가지요. 탄크레디는 엠마가 벗어놓은 구두를 신겨주고 자신의 코트를 벗어 엠마에게 입혀줍니다. 그리고 엠마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붙들지요. 이 시퀀스는 안토니오가 엠마의 허울을 벗기고 그녀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 장면과 반합니다. 반면 탄크레디의 행동은 그녀의 영혼을 다시 가두겠다는 의지와도 같습니다. 이후 화면은 천장 안에 갇힌 비둘기가 밖으로 탈출하는 장면으로 전환되고 엠마의 눈이 그를 따릅니다. 그리고 엠마는 절박한 얼굴로 안토니오와 사랑에 빠졌다며 당신이 아는 예전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신의 공간을 울리는 고해이자 은총 받는 성사이지요. 그때 탄크레디가 "넌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어"라고 일갈합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에서 온 엠마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순간부터 벽 위의 정물화 그뿐이었지요. 하지만 사랑이 불어넣은 삶의 애욕과 환희가 마침내 그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했습니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생이지요.


탄크레디와 에도에게서 부정된 그녀의 "존재"는 이제 덧없는 명예의 무덤에 묻히고 없습니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던 타성에서 벗어난 엠마는 거침없이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합니다. 이때 가정부 이다가 어떤 부연설명 없이 기쁨에 차 엠마를 도와주지요. 이들의 연대는 베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보석과 명품을 버리고 남루한 운동복을 걸친 채 뛰쳐나가던 엠마가 베카와 마주칩니다. 베카와 엠마 역시 한 마디의 말없이 환희에 찬 눈빛을 주고받습니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화면에 잠시 머무는 에도의 약혼녀 에바입니다. 이제는 미망인이 된 에바가 배를 움켜잡고 지안루카(엠마의 첫째 아들)를 나지막이 부릅니다. 에바가 유산을 한 것 같은 뉘앙스는 레키 가문의 명맥을 끊는 동시에 그녀에게도 자유를 부여합니다.(그녀는 에도와 가장 가까운 존재임에도 화면은 가족들을 따라 그녀를 줄곧 외면하지요. 말하자면 그녀는 과거의 엠마입니다) 이 순간과 함께 하는 존 아담스의 고동치는 오케스트라는 전율 그 자체입니다. 



나는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아이 엠 러브'는 엠마가 뛰쳐나간 거대한 창을 비추며 막을 내립니다. 인간 영혼의 해방이자 자연으로의 복귀라는 한 편의 서정시가 레키 가문의 대서사시 위로 인각 되지요. 음울한 겨울의 밀라노에서 시작되어 을씨년스러운 가을에서 끝난 '아이 엠 러브'는 계절을 옮겨가며 엠마의 존재에 겹을 더합니다. 거기엔 허무와 사랑, 그리고 비극까지 넘실대지요. 애욕이 엠마의 영혼을 일깨운 동력이었다면 자존을 인정케 한 것은 자애(愛)입니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모두 사랑의 공통분모가 아니던가요. 그러니 엠마는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고전의 붓칠로 그려지는 존재의 비장함은 모든 클래식이 그러하듯 더욱 오래 화자 될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이트 하우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