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떡볶이는 맛이 없다.
난데없이 엄마 디스로 시작하는 글이라니. 불효녀가 따로 없다. 설령 패드립이라고 할 지라도 내 생각은 확고하다. 엄마 떡볶이는 맛이 없다. 물론 엄마가 하는 음식 모두가 맛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못을 박아 두어야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60kg 대 몸무게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는 비결 역시 엄마의 손맛 덕분이다. (덕분인 것이 맞겠지? 감사합니다 엄마.) 이런 사실을 꺼내어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엄마는 손맛이 좋은 사람이다. 손맛이 좋다 뿐이랴? 손이 크기도 정말 크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손 큰 엄마로 나오는 이일화의 요리 스타일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유년기에 보고 자란 엄마 음식 하는 스타일 그 자체였으니까. 잡채를 해도, 사라다를 해도 다라이에 버무리는 엄마였다. 식구가 많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의 음식을 해도 얼마 안가 금방 동이 날 만큼 엄마의 음식은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유독, 유독 떡볶이는 맛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떡볶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엄마가 해준 떡볶이다. 조를 짜서 해야 하는 숙제 때문에 반에서 가끔 이야기하는 서먹한 친구 서너 명이 집에 온 날이었는데 엄마는 커다란 중식 웍에 떡볶이를 해서 방으로 들여보냈다. 떡볶이라기보다 떡탕이었다. 지금보다 한참 수줍은 성격이었던 나는 떡볶이인지 떡탕인지 모를 모양새가 퍽 부끄러웠다. 그 떡볶이는 뭐든지 컸는데, 떡도 크고 어묵도 크고 파도 크고 웍도 컸다. 계란도 통째로 툭 들어가 있었다. 마라탕이 없던 시절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마라탕 냄비 크기의 떡볶이였다. 떡은 오래 익혀 통통하게 불어 있었고, 어묵도 솜이불처럼 두툼했다. 어찌 생각하면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일 수도 있지만 학원 앞 녹진하고 꾸덕한 컵볶이에 익숙했던 나는 어쩐지 커다랗고 싱거운 떡볶이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삼십 대가 된 어느 날, 홍신애 선생님이 쓰신 책 ‘모두의 떡볶이’ 북 토크에 갔더랬다.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다 큰 어른들이 눈을 반짝이며 떡볶이 이야기를 하는 귀여운 자리였다. 어느 분은 “저는 엄마가 해준 떡볶이가 가장 맛있어요.”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어 내심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던 찰나, “엄마 떡볶이들은 대체로 맛이 없는데 의외네요.” 유레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나는 홍신애 선생님의 말에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가 분식집을 하셨거든요." 올커니. 그러면 그렇지~ 안도감이 들던 차에 홍신애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우리 엄마들은 애들 건강하게 먹이려고 야채도 많이 넣고 푹 끓이거든요. 그래서 엄마들 떡볶이는 맛이 없죠.”
뭐든 많고 커다랬던 그 떡볶이가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파도 컸고, 양배추도 컸다. 채소에서 수분이 나왔으니 넣은 물보다 더 수분도 많아져 떡은 질펀하게 불어나고 어묵도 제 크기보다 훨씬 커다랗게 푹 쪄진 것이다. 순간 내가 부끄러워했던 떡볶이는 떡탕의 행색을 한 넘치는 사랑이었던가. 그제야 돌이켜보니 여고생 딸내미 친구들에게 맛난 것을 해주겠다고 저녁부터 밥 아닌 별식을 마련했을 엄마가 귀찮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여고생이 십수 년이 지나 손님을 초대하고 음식을 차려주는 일에 흥미를 붙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요리연구가라고는 스스로 소개하지 못하지만 ‘요리먹구가’가 된 지금이 있기에 어찌 보면 엄마의 떡탕이 한몫 단단히 했겠다 싶다. 뭐든 많고 커다랬던 떡볶이가 부끄러우면서도 내 DNA에는 뭐든 많고 커다랗고 푹푹 찌는 사랑과 인심이 조미되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귀찮거나 고단하지 않은 것도 보고 자란 인심과 배려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다시 한번 그날을 떠올리며 엄마에게 문자를 남겼다. "엄마, 엄마 떡볶이는 맛이 없었던 거 같아. 싱거웠어.” 나는 은근히 엄마를 놀려줄 심산으로 말을 꺼냈지만 엄마는 타격감 제로였다. “엄마표는 다양해~”
*이 글은 배달의민족 뉴스레터 주간 배짱이에 기고했던 음식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