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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팕 Jan 31. 2023

장똑똑이를 아시나요?

점심(點心)이라는 말은 불가(佛家)에서 선승들이 수도를 하다가 시장기가 돌 때 마음에 점을 찍 듯 간식 삼아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불자에게 점심시간이 마음에 점을 찍어 주린 배를 침착하게 달래는 시간이었다면,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출근하여 퇴근하기 전까지 유일하게 진심으로 마음이 동요하는 시간이 아닐까? 나에게도 점심시간은 심장이 파도처럼 요동치는 시간이다. 오전 업무시간 동안 울화가 치민 일화를 쏟아내는 성토 대회의 시간이자, 오후에는 또 얼마나 기상천외한 일들이 생길지 점쳐보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시간이다. 적어도 최근 몇 달간의 점심시간은 그랬다. 불특정 다수의 고객으로부터 문의사항과 불만사항을 받아 해결하는 일로 업무가 바뀐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더 진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진상 고객님들 덕분에 점심시간은 오늘의 진상 캐릭터 분석 시간과 분노의 성토대회 그리고 마무리는 언제나 동료들이 위로해 주는 시간으로 점철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에 겪은 진상 고객을 곱씹으며 구내식당을 향해 걸어가는데 메뉴판 위로 등장한 식단 이름 여섯 글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장똑똑이 덮밥". 도대체 밥에 뭘 덮었다는 것일까? 덮밥 앞에 붙은 네 글자가 눈으로 대강 보기만 해도 된소리의 조합이 적잖은 재미를 주는데, 이 낱말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얼마나 귀여운 음가를 지녔는지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여러분도 "장.똑.똑.이?" 하며 소리 내어 읽어 보았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생처음 마주한 이 희한한 음식의 이름은 도대체 왜 ‘장똑똑이’가 된 것이며, 구내식당 영양사님은 도대체 어떻게 이 음식을 오늘 식단으로 올릴 생각을 하게 됐을까 궁금증이 솟구쳤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장똑똑이 가 어떤 음식인지 검색해 봤다. [채 썬 쇠고기를 간장 양념(간장, 설탕, 후춧가루, 다진 파ㆍ마늘, 깨소금, 참기름)하여 볶다가 간장물을 붓고 파채, 마늘채, 생강채를 넣고 조리다가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은 것이며, 주로 궁중에서 쌈을 먹을 때 밑반찬으로 이용하였다.]라고 네이버 지식백과 전통향토음식 용어 사전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 음식의 이름이 ‘장똑똑이’가 된 이유는 고기를 ‘똑똑’ 썰어 간장에 조린 음식이기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이렇게 이름이 지어진 배경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줄을 서며 동료 솔씨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이게 장똑똑이가 되었을까요?”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으나 아무래도 별 다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던 궁중 생각시 하나가 “똑똑 썰어서 장에 조렸으니 장똑똑이로 하세!” 하며 단숨에 지어진 이름인지 아니면 생각시 친구들을 모조리 불러다가 투표를 한 결과 나무망치를 땅땅땅 두들기며 “장똑똑이로 확정!!" 하여 붙은 이름인 것인지 추측의 장을 이어 가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솔씨는 "이걸 고민하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요."라고 했다. 말 그대로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르 웃던 시절처럼 오랜만에 장똑똑이 덮밥의 출현으로 솔씨와 나는 여고생처럼 즐거워했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이 대화가 최근 몇 개월간 나눈 대화 중 가장 인상적이고 신나는 대화였다.


얼마 후 나는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났다. 모든 직장인이 그럴 테지만 친구 역시 직장을 전장처럼 다니고 있었고 우리는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바주카포를 쏘아대듯 풀어 재꼈다. 나의 상사가 어쨌느니, 나의 진상은 저쨌느니 하며.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았던 에피소드들을 주고받을수록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풀리는 느낌이지만 어쩐지 얼굴은 갈수록 어두워졌다. 우리의 인생이 왜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냐며 한참 무거워진 분위기에서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이 친구에게 물었다. “너 혹시 ‘장똑똑이’라고 들어봤어?” 당연히, 아니 다행히 친구는 장똑똑이와 초면이었고 나는 신명 나게 설명했더랬다. “야~ 장똑똑이가 뭐냐면~ 고기를 똑똑 썰어서 장에 볶은 음식이래~ 세상에 그게 회사 구내식당 메뉴로 나왔지 뭐야~ 다들 웅성웅성 수군수군하고 그랬어. 도대체 장똑똑이가 뭐냐고~” 친구는 “뭐? 장똑똑이가 똑똑 썰어 만들었다고?” 하며 내 팔을 가져다가 저 손바닥을 칼날처럼 세워 똑똑 써는 시늉을 했다. “그럼 너는 박똑똑이냐?” 라며 내 팔뚝을 썰어 재꼈다. 역시나 ‘장똑똑이’ 이 한 방에 꺄르르 폭탄이 터져버렸다. 


지금까지 ‘장똑똑이’ 이 이름을 꺼내어 몇 달은 먹고살았다. 아니 웃어넘긴 어두운 순간 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쯤에서 똑똑히 새겨 두어야 하는 것은 꼭 ‘장똑똑이’가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다만 가장 의미 없을수록 좋고, 가장 쓸모없을수록 좋은 어떤 우스갯소리 하나쯤 비장의 무기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마주하여 참을 수 없는 어느 순간 비장하게 꺼내보시라. 


“혹시 장똑똑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 이 글은 2019년 '에세이 스토리지 가을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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