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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팕 Jan 31. 2023

왜 춤을 추느냐고 물으신다면

댄스의 목적

“이 집은 좀 남 다르다.”


라는 분위기의 공간에 들르면 심심치 않게 마주하는 책이 있다. 세련되고도 감각적인 청록색의 표지에 흑백 사진이 중앙에 실린 겉표지가 매력적인 패티 스미스의 [몰입]이라는 책.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힙스터라면 한 번쯤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법한 문장이 있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한 번쯤 터져 나오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어머 이 책은 사야 해.’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마법의 문장.

나는 왜 춤을 추느냐고 묻는다면 이 마법 같은 힘을 빌려 말하고 싶다.


에리카팕은 왜 춤을 추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듣기만 할 수 없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자면 몸 구석구석에서 합창처럼 터져 나오는 움직임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참을 수 없는 움직임을 숨기기 위해 자주 발목을 풀거나 어깨와 목을 돌려 뻐근했던 몸을 푸는 시늉을 한다. 피곤한 척 눈 깜빡임 연기까지 곁들이면서. 아무도 모르는 열연이다.


인적이 드문 지하철역에서는 전방 5m 내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면 스크린도어를 거울삼아 몇 스텝이라도 발재간을 부려본다. 겨울이면 더 좋다. 크고 기다란 코트 안 쪽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여 볼 수 있으니. 그중에서도 9호선 한성백제역은 특히 인적이 드물고 플랫폼이 광활해서 거의 매번 발재간을 부린다. (물론 몰래)  


혹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발끝을 바닥에 콕 짚고 발목을 둥글게 굴려 발목을 푸는 척 먼 곳을 바라보거나 중요한 연락이 온 것도 아닌데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쳐다본다. 어떤 그런 생활 연기.


발재간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이어폰 너머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트가 흘러나올 때 가슴이라도 앞으로 퉁겨보거나 비둘기처럼 목을 앞뒤로 까딱인다. 그러다가도 주변이 의식되면 상의 뒤쪽에 상표가 까실 거려 불편한 척 생활 연기를 곁들인다. (왜 이렇게 체계적으로 쫄보일까? 나는.) 그렇지만 이런 경험이 내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확신한다. 나만 그럴 리 없어!


 그렇게 확신하게 된 계기는 ‘내적 댄스’라는 말이 유행한 다음부터였다. 언제부턴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내적 댄스 유발’, ‘내적 댄스 폭발’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상에서 심심치 않게 보였고, 각종 매체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말이 되고 나서는 ‘그러면 그렇지. 다들 내심 흔들어 재끼고들 있었던 거야.’ 하며 안도했다. 나는 그 시류를 타고 한 술 더 떠서 스스로를 ‘내적 댄스 안무가’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적 댄서’로는 나를 명명하기가 부족하니까. 왜? 난 실로 좀 추니까!


내적 댄스 안무가가 되는 길은 쉽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실제 세계의 몸뚱이로는 성공할 리 없는 다리 찢기 라던지, 빠르게 상모 돌리기 라던지, 등을 꺾듯이 뒤로 젖혀 버티는 동작이라던지, 심지어 파트너가 필요한 듀엣 댄스까지 내적으로는 안 되는 춤이 없다.


자주 듣는 음악에는 날마다 안무를 조금씩 덧대어 가며 한 편의 무대를 상상하기도 한다. 그럼 내적 댄스 안무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암. 이런 뻔뻔함으로 나의 두 번째 독립 출판물 [우_잉 : o_0]의 작가소개란에는 ‘내적 댄스 안무가’라는 표현을 쓰기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부터 그려왔던 '안무가가 되는 꿈'은 ‘내적’이라는 단어만 붙여주어도 금방 현실이 됐다. 내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딱히 증명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아주 폐쇄적인 명명이지만 또 같은 이유에서 안전한 명명이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공공장소에서 잠시 두둠칫대는 것으로, 그리고 내적 댄스로 패티 스미스 몰입의 명문장을 차용하지는 않았을 터. 가끔 나는 외적으로도 춤을 춘다. 몸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춤을 작정하고 추는 날들이 있다. ‘작정하고’라는 말에는 ‘카메라를 켜고’라는 말이 들어갈 수도 있으며, ‘연습실을 빌리고’라는 말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본격적으로 작정한 날은 ‘연습실을 빌려서 카메라를 켜고’ 춤을 춘다. 작정하고 춤을 추는 동기는 희, 노, 애, 락이라는 인간의 대표적인 네 가지 감정에 따라 구분 지어 설명할 수 있겠다.


‘희’


나는 비교적 인생의 희열을 자주 느끼는 편이다. 1인 가구 가장으로서 나의 희열은 다름 아닌 분리수거 이후 쨍하게 끓어 오른다. 싱크대에 쌓여있던 설거지도 다 하고, 퀴퀴하게 고여있던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렸는데 현관에 쌓여있던 분리수거까지 완벽하게 클리어했을 때. 아무 냄새도 나지 않고 깔끔한 집을 관람하는 쾌감이란. 그럴 때는 몸이 쌈바를 부른다. 앞 뒤로 스텝을 왔다 갔다 하며 골반을 좌우로 크게 움직이고, 팔은 허공을 부드럽게 어루 만지는 동작에 남미 음악까지 곁들이면 그게 쌈바지 뭐. 별 건가. (최소 오바쌈바) 분리수거 이후 기쁨의 순간을 나누고자 #분리수거세레모니 라는 해시태그로 몇몇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도 있는데 나와 같은 1인 가구의 가장뿐 아니라 수많은 주부 인친들의 공감을 샀다. 딱 저 느낌이라고.


‘노’


7년 간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분노하는 순간이 참 많았다. 직장에서 분노 유발 상황은 다채롭고 다양하게 일어나지만 특히 어린 여자 사원, 대리로 일하는 동안에는 직급과 성별 때문에 무시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이 어린 여자가 말했을 때는 불통이다가 나이 많은 남자가 나서 주면 그제야 말을 들어먹는 그런 불쾌한 일들이 왕왕 벌어졌다. 그렇게 분노하는 날이면 퇴근하는 길에 소위 ‘디바 Diva’라고 일컬어지는 여성 솔로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힘찬 위로를 받았다. 이를테면 비욘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레이디 가가 등등… 풍부한 성량,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가사, 가슴까지 울렁이게 만드는 깊은 진동의 비트가 매끄럽게 어우러진 명곡들을 듣고 있자면 덩달아 내가 가진 힘도 세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 공간 안에서는 위축되고 무기력한 쫄보였다면, 퇴근길 디바들의 노래를 듣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여느 디바로 빙의하며 한껏 보무를 당당하게 보폭을 늘려봤다. 그리고 스텝으로 연습실을 예약해서는 그간 내적으로만 추던 춤들을 릴리즈한다. 험상궂은 표정도 곁들이며, 바닥을 부술 기세로 쿵쿵 발도 구르고, 과감하게 턴을 돌아거나 아예 바닥에 주저앉거나 누워서 더 과격하고 과감한 동작을 이어간다. 한 마리 암사자가 된 것처럼. 싫은 소리 못하고, 거절 못해서 혼자 속 끓이는 사람은 지금 이 연습실에는 없다. 이 구역 미친년만 있을 뿐. 비야취 레벨을 한껏 끌어올려 내면에 가득 차 있던 화를 춤으로 풀어냈다. 그렇게 한참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바닥에 누워 헉헉대고 있으면 한낮에 있었던 일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땀 흘리며 머리가 헝클어진 어느 암사자 한 마리만 남는다. 나는 박사원이나 박대리가 아니라 암사자로 마무리되는 하루가 좋았다.

 

‘애’

란 원래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 만큼은 사랑 ‘애愛’의 의미로 적겠다.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뾰로롱) 세상에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댄서들이 수두룩하고도 빽빽하다. 최근 종영한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인기로 댄서들에 대한 인기가 20000% 정도 증가했다. 이제야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지만 댄서들은 훨씬 이전부터 준비가 되어있었고, 덕질의 타깃이 될만한 스타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집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중에게 알려져야 하는 멋진 댄서들은 너무나 많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댄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유튜브의 발전을 목도한 이후다. 유튜브에 노래 한 곡을 검색하면 같은 곡으로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짠 각기 다른 안무를 앉은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가령, Justin Timberlake의 Filthy라는 노래를 검색하면 높은 굽의 힐을 신고 요염하게 움직여 표현하는 힐댄스 안무 영상도 있는가 하면, 정통 힙합으로 해석해 스웩을 한껏 뽐내는 영상도 있고, 곡의 기계음을 십분 살려 사람이 아니라 로봇처럼 표현하는 영상도 왕왕 있다. 그 로봇들도 어떤 안무가가 해석했는가에 따라 다 다른 모습의 로봇들로 표현된다. 같은 한 곡을 가지고도 온 세상의 댄서들이 각양각색의 해석을 내놓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오랜 취미가 되었고, 나도 이들처럼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춤을 춰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기저에 깔린 묵직한 비트 / 그 위에 무심하게 튕기는 베이스 소리 / 그 위를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멜로디의 높낮이 / 그 위에 맞춤으로 주문한 듯한 가사 그리고 가수의 기교 이 모든 게 라자냐처럼 켜켜이 쌓인 한 곡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은 식욕과 같았다. 다만 혀와 이가 아닌 온 사지와 오장육부로 음악을 즐겨보는 것.이라고 하니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을 즐기는 중2병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좌우간, 나대로 음악을 해부하고 해체해서 상상했던 동작들은 몸 구석구석 고여있다가 어느 날부터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락’

올해 가장 즐거운 순간을 꼽자면 7년간의 직장인 생활을 청산하고 마지막 출근을 한 날이었다. 그렇게도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니콜 키드먼이 전 남편인 톰 크루즈와 이혼소송을 마무리 짓고 파파라치에게 찍힌 그 유명한 짤만큼 개운하고 즐거웠다. 사실 마지막 출근하는 날 훨씬 이전부터 퇴사 기념으로는 어떤 노래에 춤을 추어야 가장 개운할까 기념이 될지 벼르고 있었는데 그렇게 내가 선택한 곡은 “I will survive”. 한국에서는 가수 진주가 “난 괜찮아”라는 곡으로 번안한 노래로 유명한 노래다. 특유의 매몰차게 이별을 고하는 느낌과 회사를 나가도 나는 잘 살아남을 거라는 의미까지 퇴사와 이만큼 잘 어울리는 노래도 없었다. 이 노래에 춤을 추겠다고 마음을 먹은 날 이후로는 매일 이 노래를 들으며 출퇴근을 했다. 곧 헤어질 연인 면전에 날카롭게 검지를 한 바퀴 돌리며 “뒤 돌아가~”라는 말을 전하는 여자. 그 매몰차고 도도한 이미지를 상상하며 그간 나를 괴롭히던 모든 얼굴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통쾌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제 보니 춤은 나에게 더없이 즐거운 심리치료였다. 종종 춤을 춤추지 않았더라면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퇴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본 이후로 어느 지하철역에서나 횡단보도 앞 신호등을 기다리며 쏟아지는 비트의 주문을 견디지 못하고 발재간을 부리고 있거나 고개를 까딱이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지금 저이에게서 희, 노, 애, 락의 합창이 터져 나오고 있구나라고.





* 이 글은 2021년 [move move move :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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