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리카팕 Feb 11. 2023

최고의 변명

어떤 경험은 예기치 못한 학습효과를 야기한다.

가령, 유년기 구몬 학습지를 구독했던 경험은 수학 실력의 향상보다 더 창의적인 변명, 더 고도화된 변명을 효과적으로 양산한다.


“아팠어요.”

“학교에 두고 왔어요.”

같은 비교적 노말한 변명에서 시작하여


”원래 없었는데요. “

”원래 이게 다예요. “

어쭈구리? 요놈이? 꿀밤을 유발하는 악랄한 거짓말로 발전하다가


”밥 먹으면서 풀다가 짬뽕 국물에 젖었어요.”

“학교 책상 서랍에 넣었는데 껌이 들러붙어서 도대체 안 떨어져서 찢어졌어요.”

”강아지가 물고 도망갔어요. “

믿을 수 없는 초단편 소설까지. 물론 강아지는 죄가 없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구몬 선생님이 오른쪽 상단 모퉁이에 빨간펜으로 요일을 적어 하루치, 한 주간의 할당량을 정해주셨다. 선생님이 다녀간 요일과 그 후 이틀 정도는 비교적 성실하게 문제를 풀다가 다시 선생님을 만나게 될 날이 점점 다가오면 문제를 풀 생각보다 어떤 변명을 할지 짱구를 굴렸다.


수학을 하랬더니 꼼수를 썼고,

계산을 하랬더니 계략이 늘었다.


계략보다도 잔머리 쓰기에 가까웠지. 사춘기 때부터 나는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이 나기 시작했는데 당시 한의사 선생님은 “잔머리를 많이 써서 흰머리가 나는 거야~ 인마~“ 라며 진단인지 점꾀인지 모를 말을 해서 사춘기 소녀를 짱나게 하셨다. 진짜다. 아직도 그 말을 떠올리면 짱난다.


사실, 유년기의 나는 천상 내성적이고 쫄보였기 때문에 변명하는 일 자체가 두려웠다. 그런 와중에 실제로 내가 도전해 봤던 변명은


“학교에서 풀다가 놓고 왔어요.” 정도였다. 에게게. 그러나 문제는 풀지도 않았고, 학습지는 언니방에 있던 피아노 뒤로 숨겼기 때문에 학교에는 가져가지도 않았다는 게 사건의 진상이다. 내성적인 아이라고 해서 솔직하고 성실한 것은 아니다. 그럴듯한 점잖은 꾀를 낼 뿐이었다.


집안의 막내, 나까지 수험생이 되고 언젠가부터 아무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피아노를 처분하는 날이었다. 피아노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꿍쳐둔 구몬 학습지가 뭉터기로 발견됐다. 먼지 쌓인 종이들은 유년기 내 변명의 시체들이었고 피아노는 내 변명의 무덤이었다.


서른넷. 나는 은발의 여자가 됐다. 사춘기 때 한의사 아저씨 말에 따르면 난 잔머리로 뒤덮인 어른이 됐다. 여전하게 짱구를 굴렸다  샤워를 하며 도대체 원고를 한 달째 넘기지 않는 건에 대해 어떤 변명을 구사할지.


팀장님... 제가 사실 되게 아팠어요. or 그간 참 바쁜 나날들이었어요. => 모두 탈락이다. 조카를 만나고 만두를 먹고 맥주잔을 부딪치는 인스타 스토리를 편집장님이 보셨으니까.


엇? 이미 드린 줄?

=> 박연진이냐? 탈락.


잊고 지냈습니다. 죄송합니다.

=> 사실 단 하루도 잊은 적 없어요. 팀장님을 짝사랑하나 봐요.

=> 징그러우니까 탈락.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있어서요. 인터뷰집 어렵네요 ·̫

=> 여태? 거의 3주가 흘렀다. 이건 의지의 문제다. 탈락.


제가 왜 그랬을까요? 저를 몇 대 세게 치세요.

=> 되도 않는 자학. 탈락.


최고의 변명은 무엇일까? 노말한 변명도 아니고, 박연진처럼 악랄한 변명은 더더욱 아니며 창의적인 변명도 미안하지만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세요.


10살을 세 번을 먹고도 3년을 더 처먹은 나는 안다. 최고의 변명은 없다. 변명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가 없다. 잘못을 했는데 높을 수가 있나. 이미 나는 지상에 없다. 지하에라도 앉을자리가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은 심정이다. 열 살을 세 번 먹고도 삼 년을 더 씹어 먹은 나는 이제야 당시 구몬 선생님은 무슨 심정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이미 다 알고 계셨겠지. 이런 애들, 이런 변명을 수도 없이 마주 했겠지. 그냥 월급 받고 하는 일이니 어서 이 시간, 이 집, 이 아이와 빠염하길 기다리셨을 수도?

그럼 편집장님도 구몬 선생님과 같은 마음일까 생각한다. 윽.


이제는 피아노가 아니라 지나가는 날짜들이, 넘어가는 달력이 내 변명의 무덤처럼 느껴진다. 뱉지도 못하고 짱구를 굴린 변명들을 묵힌 시간의 무덤. 시체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내 변명들은 언제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샤워할 때도. 걸을 때도.


나중에 마감 불가 작가의 기록

<커피만 마시고 잠만 잘 잔 날들이 너무 많다.>

같은 에세이를 만든다면 이 글을 실어야지.

같은 짱구만 굴리는 서른넷 은발의 나.

seolln.net 이러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장똑똑이를 아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