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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ul 18. 2023

임산부가 되어 본 지하철 임산부석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단상

나는 집에서 직장까지 도어 투 도어로 1시간 25분, 2번의 환승을 거쳐 25개의 지하철역을 지나서야 사무실에 갈 수 있었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매일 타면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보았고, 이 좌석의 필요성과 실효성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임신을 하기 전까지는 임산부 배려석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노약자석이 있으니 임산부도 노약자석을 맘 편히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임산부로 보이는 분이 있다면 앉아 있다가 바로 자리를 비켜드리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던 나였다.


출처: https://news.seoul.go.kr/traffic/archives/27958


나는 임신 초기에 많은 임산부가 경험하는 입덧과 체력 저하, 배 통증 등의 증상이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하철 자리가 없을 때 좀 서서 가도 괜찮았다. 그래서 분홍색 임산부 배지를 받기 전까지는 임산부석에 앉지 않았고, 임산부 배지를 받고 나서도 배지를 드러내지 않고 그냥 서 있는 때도 많았다.


하지만 임신 중반을 지나서부터는 배가 꽤 땅땅하고 무거워졌고, 수시로 배가 뭉치는 느낌과 밑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이 느껴졌다. 오래 걷거나 서면 몸에 무리가 간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름대로 건강한 몸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도, 체력은 절대 임신 전과 같지 않았다. 보폭과 발걸음은 점차 느려졌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예전보다 몇 배의 체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수면의 깊이와 길이도 짧아져서 항상 피곤을 달고 있는 데다가, 무게가 늘어나고 부종이 생기면서 하반신은 너무나 무거웠다.


이전에는 가방도 들고 다니지 않으며 가볍게 출근하는 날이 많았는데, 오직 임산부 배지를 달고 다닐 목적으로 가방도 매일 지참하고 다녔다. 어느 날부터는 앉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스크린도어에 분홍색 임산부석 스티커가 붙어있는 곳에서만 기다리게 되었다. 지하철에 타서는 분홍 좌석이 비어 있는지 매의 눈으로 열심히 스캔하고 앉게 되었다.


지하철 칸에 몇몇 사람이 서 있을 정도로 사람이 꽤 많음에도 분홍색 자리가 비어 있는 날에는 시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득 느끼며 임산부석에 앉았다. 내가 잘못 앉은 것이 아니라는 표시로, 임산부 배지가 걸린 가방을 잘 보이게 무릎에 얹어 두면서 말이다.


반면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봐도 임산부가 아닌 것 같은 분들이 앉아 있는데 다른 곳에 앉을 곳이 아무 데도 없으면 마음이 쿡쿡 쑤셨다. 어느 날은 감정 주체가 안 되어서, 이런 몸으로 앉지도 못하고 회사에 가야 하는가 싶어 눈물이 한 방울 나기도 했다.


혹자는 임산부인데 비켜달라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앞에 가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직접 말하는 임산부 분들도 계실 것이다. 아마 임산부가 앞에서 양보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 바로 자리를 내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같이 지하철에 탄 어느 날, 남편은 나보다도 더 빠르게 빈자리를 스캔하더니 임산부석에 앉아 계셨던 남성분께 자리를 비켜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다른 날에도 임산부석에 앉은 나이 드신 여성분께 아내가 임신했다고 양보를 요청하기도 했었다. 두 번 모두 좌석에 앉았던 분들은 흔쾌히 양보해 주셨다.


반면 나를 포함한 꽤 많은 임산부들은 임산부석에 앉은 분 앞에 가서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을 것이다. 임신 전에도 할 말을 다 못 하고 살았는데, 임신을 하고 나니 매사 태도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불편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지 않으려 하게 되었다. 임산부석이 배려이지 의무는 아니기에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어쩌다 심기가 불편한 사람을 건드려 공연히 해코지를 당하느니, 그냥 다른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 칸이 꽉 차 있는데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 있지 않으면, 굳이 나를 의식해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도 될 법한 애매한 자리에 서 있었다. 괜히 일반 좌석 근처에 서 있다 보면, 앉아 있는 분에게 비켜 달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줄곧 서서 가다가 밑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그렇게 서 있는 상황이 조금 서러웠다. 10 정거장 가면 될 회사를 25 정거장 가야 하는 회사로 이직해서, 게다가 재택근무도 안 되는 곳으로 다니게 되어 아기에게 미안해하곤 했다. 회사를 다니는 것과 이직을 한 것 모두 내가 결정한 것이었지만, 당장 몸이 몹시 힘들었기에 지하철만 타도 쉽게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물론 임신 후 호르몬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나는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사무직이었고, 출퇴근시간 '지옥철' 일 것이 분명한 2호선이나 9호선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회사 출근 시간은 10시 전후여서 가장 붐비는 시간도 아니었다. 직장 분들은 모두 임산부였던 나를 정말 많이 배려해 주셨고, 그 사실로 눈치를 주거나 불이익을 받은 것도 전혀 없었다. 출산 예정일 전날까지 일해야 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나는 출산 예정일 1달 전에 휴직을 쓸 수 있기까지 했다.


나의 상황은 임신을 겪는 많은 분들 중 상대적으로 아주 괜찮은 경우에 속할 것이다. 더욱이 임신 전날까지 회사 일, 집안일, 밭일을 하던 이전 세대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 '라떼는 말이야-'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임산부가 공통적으로 겪는 증상(몸이 무겁고 둔해지고 배가 뭉치고 체력이 떨어짐) 정도만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몸으로 다니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32주 차가 넘어가자 아침에 일어나는 것, 지하철역에서 환승 계단을 올라가는 것, 역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올라가는 단순한 일상에서부터 숨이 가빠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로 향하며, 길게 생각하지 말고 제발 딱 오늘 하루만 잘 가보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후기 임산부 체력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고, 마지막 달만 남겨두고 쉬겠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결국 하루하루 출퇴근이 너무 버겁게 느껴져 2주를 더 당겨 쉬게 되었다(출산일이 당겨져 결국 마지막 4주만 남기고 쉰 것이 되었지만 말이다).


휴직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더 이상 아침에 비어 있는 임산부석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임신 37주 차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는 지하철은커녕 택시를 타도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쉬지 않고 걸어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체력이 거의 없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보통 걸음으로 10분 거리밖에 안 되었는데도 말이다. 




직장인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서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에서 댓글로 열심히 싸우는 것을 보았다. 성별을 떠나, 좌석의 필요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오면 비켜주면 되는데 굳이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 역시 임신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위해 분홍 좌석에 앉지는 않았지만, '꼭 이렇게까지 한 칸에 두 자리를 할당할 정도로 필요한가?'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남편도 내가 임신한 것을 옆에서 보기 전까지 임산부석의 실효성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입장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댓글 중에는 '임산부는 그렇게 지하철에 많이 타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극도로 낮으니 임산부를 많이 볼 일도 없고, 임신을 했다면 자차나 택시를 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임산부의 지하철 출퇴근 수요는 상당할 것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직장을 다니는 상황에서 임신을 했다면, 직장에 특별한 제도가 있거나 퇴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 임산부인 상태로 꽤 오랜 기간 통근을 하게 된다. 임신 기간은 280일이지만, 법적으로 출산휴가를 낼 수 있는 것은 출산 예정일 45일 전이기 때문이다(법정 출산휴가는 90일이지만, 45일 이상은 꼭 출산 후에 사용해야 한다).


임산부가 근처에 오면 비켜 주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사실 임산부 입장에서는 그 상황이 쉽지 않다. 나의 경우에는 배려를 강요하는 것 같아 웬만하면 자리를 요청하는 말도 쉽게 꺼내기 어렵고, 만석일 때 괜히 눈치 주는 느낌일까 싶어 근처 좌석에 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만 이런 걸까 싶었지만 주변 임산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부산에서는 임산부 배지를 단 분이 가까이 가면 핑크 라이트가 켜지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광주에서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셨습니다. 임산부가 아니시라면 임산부를 위하여 자리를 비워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나오는 좌석을 시범 운용한다고 한다.

광주, 부산, 그리고 서울 지하철의 제도 중 어떤 것이 맞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승객이 앉을자리도 부족한데 임산부 배려석이 꼭 필요한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여전히 많을 것이다. 많은 분들이 임산부가 노약자라는 것에 공감하고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있지만, 또 굳이 몇 없는 임산부를 위해 배려해 줘야 하나 싶을지도 모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한 임신인 데다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굳이 배려까지 해 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임산부 좌석 양보해 주세요.
여자라서 임산부라서라고 생각지 마시고
당신이 늙어 퇴직하면
당신의 연금을 위해 세금 내 줄 아이들을 위한다고
생각을 전환해 보세요.

위의 광주 임산부 배려석 기사에 달린 한 댓글이 머리를 탁 치게 만든다. 


초저출산 국가인 한국의 상황에서 나처럼 임신을 한 번 겪어보고 임산부 좌석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사람이든, 약자를 배려하고 싶은 사람이든, 각자의 이해타산을 생각하는 사람이든 이 댓글에는 모두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다음 정거장에서 타게 될 임산부를 위해 분홍 좌석을 그냥 비워 둔다면 좋겠다. 바로 누군가에게 감사가 전달되지는 않겠지만, 그 자리에 앉을 어떤 몸 무거울 임산부는 오늘도 시민들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자리를 이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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