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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라 클래스 Jun 16. 2021

일의 무게감, 그리고 삶의 가벼움에 대하여

고등학교 내내 희망 학과에 ‘전기전자 공학과‘ 라고 적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대학 학과 소개가 나와 있는 책자에서 

가장 그럴듯 하고 멋진(로봇을 만들지 않을까 싶어서)과라서 선택을 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3년간 희망 학과는 재수할 때 한순간에 지워지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다 다시 수능공부를 하는 형이 나에게 물었다. “너 전기전자 공학과 나오면 뭐하는지 알아?” 

나는 당연히 잘 모른다 했고, 그 형은 “아마 지방 공장에 가서 기계 관리하는 일을 할거야. 공부 잘하면 연구소에 들어갈 수도 있고~”라고 말했다. 

나는 좀 곤란한 표정과 함께 "그렇게 재밌을 것 같진 않네요!” 라고 말했고. 형은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넌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나는 마치 준비 했던 말처럼 바로 답했다. "TV손자병법(87~93년 방영된 KBS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회의실에서 모여 이야기 나누고 회의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 형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래?! 그럼 광고 한번 해봐~”


그랬다. 그 한마디에 나는 광고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언론정보 학과에 들어갔고 광고를 배우고, 광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나는 점점 광고를 내 미래의 직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광고 책을 읽고 공모전을 하고, 동아리 활동도 여러개 했다. 

학점도 겨우 3.0 영어 점수도 없던 나는 운좋게 4학년 2학기에 광고 회사 인턴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바로 정직원이 되었다. 

광고는 정말 재밌었다. 인턴이든 사원이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TV에서 보던 장면보다 더 재밌고 배우는 것도 많았다. 시장 조사나 소비자 인터뷰, 기획서 만들기, 영상 편집 등 모든 게 다 새롭고 재밌었다. 

밤새 촬영장에 있는 것도 좋았고, 거기서 나눠주는 밥도 너무 맛있었다. 야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좋았고 주말에 나가는 것도 좋았다. 

즐겁게 배우고 성장하는데 회사에서 돈도 주는 ‘돈 받는 대학원’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평생 광고를 할거라 생각을 했고, 내 꿈은 광고회사 사장이었으며, 칸 광고제에서 수상하는게 인생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나 만족을 모르고, 좋아했던 것을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존재인가보다. 

나는 좋은 점보다 좋지 않은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고 그것을 바꿔보고자 3년 반만에 첫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갈 곳을 정해 놓지 않고 바로 그만 두었기에 5개월 정도의 백수(혹은 구직) 생활을 마치고 다른 광고회사로 이직을 했다. 

처음 회사보다 규모가 큰 외국계 회사라 무엇이든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려 2개월 반만에 그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너무 보수적인 분위기와 사수에 대한 불만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무례함(?)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별 볼일 없는 존재였음에도 불만을 가득 가진 체 대안 없는 퇴사를 또 하게 된 것이다.


잠깐의 백수 생활을 마치고 또 다른 광고회사로 이직을 했다. 면접 때 두번의 빠른 퇴사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했고,

나는 “10년간 할 이직을 벌써 다 했습니다. 이제 이 회사에서 오래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다행히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10년은 커녕 10개월만에 세번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퇴직금을 받을 만큼 버티지도 못한 체 그렇게 빨리 그만두게 된 것이다. 

세번째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일이 너무 많아서 였고(마지막 3개월간 주말포함 휴일 5일, 평균 퇴근시간 12시~1시), 

더 이상 광고가 재밌거나 내 성장을 도모해주지 않는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신입 사원때부터 종종 진행하던 사이드 프로젝트를 

나의 새로운 일로서 시작해보고 싶다는 동기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재수 때부터 대학시절 내내 내 평생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광고일을 불과 4년 반만에 끝내게 되었다. 

대략 광고를 하기 위해 노력했던 기간과 내가 그 일을 하게 된 기간이 거의 비슷한 것 같다. 

4년반 쫓아 다닌 여자와 사귀게 되었는데, 사귄지 4년반이 되자 갑자기 헤어지게 된 것 같은 느낌 이랄까? (그런 경험은 없지만)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게 된 것이다. 그때는 평생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닌게 됐다.  


나는 더이상 광고를 하지 않겠다 말을 했고, 국내 TOP2 회사에서 아주 좋은 제안이 왔음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신입사원때부터 진행하던 사이드 프로젝트를 본격적인 나의 새로운 일로 만들고 싶었고, 나는 사업이란 걸 시작하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는 ‘대학생 취업진로 스터디’였다. 신입 사원 주제에 학교 및 연합동아리 후배들을 대상으로 취업과 진로에 대한 스터디를 했는데 꽤나 성과가 좋았다. 

총 6주의 커리큘럼이고 매주 4~5시간 동안 진행이 되었으며 인원은 7~10명 정도 되었다. 광고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5번 정도의 스터디를 진행 했었다. 

처음부터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단지 선배들에게 받은 도움을 나 역시 돌려주고 싶었던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그 일이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광고마저 그만두게 만들고, 다시금 평생의 일로 자리매김 하다니 참으로 신기 했다. 


나는 스터디를 확장해서 학원처럼 운영을 하고자 했다. 추가로 개인 상담 서비스도 진행하고, 대학교나 대형 영어학원과도 제휴를 맺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아주 꿈이 컸다. 나에겐 너무 멋진 일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였으며, 주변의 응원도 정말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호기 있게 시작한 그 스터디 사업이란 것은 8개월만에 아주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8년 아니 800일도 못 버틴거다.

나는 동네(학교 및 동아리)에서 유명한 강사였다고 보면,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려고 큰 물로 나왔더니 눈에 띄지도 못하는 듣보잡이 되어있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사업가의 돈을 쫓는 마음이 없었다. 그저 좋은 뜻을 가지고 일을 하다 보면 돈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믿었는데, 그건 10년, 20년 버틴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나 역시 시도해 볼 수 있었겠지만 1년 버틸 돈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새롭게 찾은 평생의 일을 얼마 되지 않아 허무하게 그만두게 되었다. 

취업 진로 스터디를 위해 애쓰고 고민하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8개월 정도가 아니었을까? 

광고 일처럼 두번째 일도 8개월을 쫓아 다녀 사귀게 되고, 8개월만에 끝나 버린 두번째 연애 같았다.  


첫 취업을 이후로부터 5년 남짓한 시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평생의 일이란것은 그 일을 위해 쫓아온 시간만큼 유효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고, 

평생(적어도 20년 넘게) 해야 할일을 찾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 했다. 왜냐면 10년을 쫓아야 10년 밖에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더이상 평생의 일을 찾기 포기 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든 평생의 일이 될거란 확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어떤 일이든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월급을 주며, 적당히 배울게 있으면 그걸로 족하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새롭다면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동아리 선배가 운영하는 보수가 굉장히 적은(하지만 지분이 있는, 하지만 엑싯은 어려운)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했고,

농산물을 유통하는 공사의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했으며, 바이럴 마케팅 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정처없이 (평생의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몇번의 퇴사와 이직을 더 했다. 

재미와 성장은 됐고 돈을 가장 많이 주는 곳으로 가보자란 생각에 다시 광고회사로 복귀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총 8번의 이직을 했다. 

중간중간 백수 생활을 영위하면서 실업급여로 몇달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취업 진로 스터디 사업을 다시 할까 했지만

두려웠는지 결국 다시 시작하지는 못했다.(다만, 사이드 프로젝트로써 몇번의 스터디는 계속 했었다.)


지금와 생각을 해보니, 나는 대학 때부터 평생의 일을 찾으려 애썼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야 전문가가 되어서 돈도 많이 벌고 인생에서 성공을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나의 덜 성숙한 마인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며 누구나 만족을 모르게 되는 것 때문이었는지 어느땐가 그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갈 곳을 잃은 망아지 마냥 되는 대로 (그러면서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또 다시 신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각가지 이유로 그만두고 다시 또 입사하고 참으로 다양한 회사 생활이었다. 


이제와서 나는 ‘평생의 일’이란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본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때 까지 우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늘 최선을 그래서 늘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들어왔다. 

그래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돈, 명예, 사랑 등등) 근데, 애초에 그것은 의사나 변호사, 외교관 같은 일부 전문직에 대한 기준이었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차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최고 전문가는 1% 정도만 될 수 있다. 나머지 99%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두에게 1%의 위대함과 그것의 훌륭한 점을 말하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라 하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가이드란 생각이 든다. 


나는 현재 굉장히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평생의 일도 아니고, 전문가로 성장하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대기업이면서, 보수와 워라벨이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평생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진심이다)

난 언제든 이 회사를 그만둘 수 있고 큰 기대와 만족을 기대하지 않고, 단지 내 쓰임에 감사할 줄 알며 지내고 있다.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며, 욕심 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며 일하고 있다. 

그리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내 평생의 일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많이 하고 있다. 독서모임 파트너, 보드게임 진행자, 버킷리스트 운영자 등


기존의 선배들 그리고 사회가 요구했던 평생의 일이란 가이드를 버리고 “일은 일이요. 삶은 삶이로다.”란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내 능력과 쓰임의 정도에 따라 돈을 받고, 조금의 재미, 조금의 성장, 조금의 만족을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일의 시간이 제일 많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일이 최우선이 될 필요는 없다.

평생의 일은 됐고, 평생의 내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법을 더욱 잘 알았으면 좋겠다. 나 그리고 내 주변 분들 그리고 많은 후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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