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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향 Nov 21. 2020

햇살과 바람에게 맡기다

2020.11.21. 토요일


어릴 적 살던 집은 넓은 흙마당이 있었다.(어느 순간 시멘트로 흙을 덮어버렸지만) 집 안 왼쪽 끝에 있는 나무와 오른쪽 끝에 있는 나무에 단단한 노끈을 동여매 빨랫줄을 만들었다.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빨랫감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햇볕 쨍한 날이면 한 줄 길게 식구들의 옷이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한다. 너무 무거워서 빨랫줄이 쳐지기 때문에 빨랫줄 가운데 기다란 장대를 준비해 빨랫줄을 괴면 그럭저럭 그 무게를 이겨냈다.

쨍한 가을볕은 곡식만 익히는 게 아니다. 햇볕은 선선한 바람과 함께 춤추며 빨랫감을 뽀송뽀송하게 만든다.  가끔 장대 끝에 빨간 고추잠자리 한쌍이 앉아있곤 했는데, 나는 그걸 잡아보겠다고 장대 주변을 알짱대다가 그만 장대를 쓰러뜨리기도 했다. 높이 매달려있던 빨래가 순식간에 축 늘어지면서 흙마당에 질질 끌려버린다. 그때 그 절망감은 엄마의 매서운 잔소리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



경의선 숲길 연남동 주변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예쁜 카페들이 즐비하다. 중간중간에 아파트도 몇 동 있는데, 오늘은 그 앞을 지나다 정겨운 모습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 공터에(마당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빨래를 널어둔 것이다. 처음에는 멀리서 보다가  가까이 가서 다시 봤다. 어찌나 가지런하게 잘 널어두었는지,  디스플레이를 해 둔 것처럼 보였다.


요즘 대부분 빨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리고, 그것도 귀찮고 마뜩잖으면 뜨거운 빨래건조기에서 말린다. 그에 비하면 저 빨래들은 햇살과 바람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잘 마르고 있다. 빨래를 널고 걷는 사람, 그 옷을 입는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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