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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Jul 09. 2017

7만원에 인생볼펜 찾기


글로 먹고 사는 기자 일을 시작했을 때
먼저 관심을 갖게된 건 볼펜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뷰를 가도 노트북 척 펴놓고 받아치는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됐지만
당시엔 백팩에서 수첩 꺼내들고 손에 쥐나도록 볼펜으로 받아 쓰는게 일상이었다.

(사람 말하는 앞에서 탁탁탁 키보드 치는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
무슨 경찰 조서 쓰듯 내 말을 누군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겠다고 받아치면 아무래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말하는데 눈도 보지 않고 키보드나 두드리고 앉아있는건 너무 기계적이지 않나)

처음엔 만년필을 기웃거렸다.
몽블랑에 대한 환상, '글쟁이라면 역시 만년필이지'하는 허세가 뒤섞인 결과였다.
워터맨 엑스퍼트, 라미 사파리/조이/ABC스쿨 등을 썼다.(비싸고 좋은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곧 나에게 '만년필은 똥폼'에 불과하단 걸 깨달았다. 상대방속사포같은 속도의 말을 받아적기엔 일단 만년필이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글자 번지지, 잉크 손에 묻지, 카트리지도 빨리 닳. 심지어 비라도 찔찔 맞으며 취재하는 날엔 글자가 지워져 보이지않는 경우까지 있다.


비맞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회부 기자에게 이런 상황은 흔한 일이다.

언젠가 회사에서 '무엇이 사회부 취재영역(소위 나와바리)인가'를 놓고 얘기한 적이 있다. 가장 막내들이 배치되고, 바닥을 박박기는 처지를 잘 보여주는 것인데 <1.지붕이 없으면 사회부, 있으면 다른부> <2.에어컨이 없으면 사회부, 있으면 다른부> <3. (사고,사건 등으로) 사람이 죽으면 사회부, 살면 다른부> 하는 식이다.


여튼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후로 면세점에 가도 몽블랑 매장 근처를 기웃거리지 않게 됐다.


미쓰비시펜슬 '유니 제트스트림 1.0'


방황 끝에 미쓰비시펜슬의 '유니 제트스트림 1.0' 볼펜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 쓰는걸 잠깐 잡아봤다 신세계를 접했다.  
일단 색이 진하고, 똥이 적고, 필기감이 매우매우 부드럽다. 볼펜의 3박자, 어느 하나 빠지는게 없다. 괜히 '고시생의 볼펜'이요, 웬만한 기자들이 애용하는 볼펜이 된게 아니었다.

플라스틱 외관이 좀 아쉽지만 그게 뭐 대수랴. 다스채 사다놓고 이 볼펜만 100개 넘게 썼다.

가끔 교보에서 몽블랑을 볼 때면 여지없이 흔들렸지만 이내  시필을 해보고 영락없이 실망했다. '이건 제트스트림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군.'

영영 제트스트림의 노예로 살 것만 같던 어느 날, 우연히 일본 쇼핑몰에서 몽블랑 볼펜에 제트스트림 볼펜심을 끼워 쓸 수 있는 어댑터를 발견했다. 아예 어댑터 필요없이 'D1'이란 국제규격 금속 리필심이 있다는 것도 알게됐다.
'이는 곧 브랜드 볼펜의 형편없는 심을 빼내고, 제트스트림 심을 끼워 쓸 수 있다는 것!'

점심시간, 광화문 교보로 달려갔다.
필기감과 가성비를 고려한 끝에 결국 고른 것은 독일제 '카웨코 스페샬 미니 알 블랙' 볼펜이었다. (정가는 7만2000원인데 이런저런 할인을 받으면 더 싸다.)


카웨코 '스페샬 미니 알 블랙' 볼펜. 케이스도 멋지다


군더더기 없는 팔각형 바디,

차가운 무광블 알루미늄,
'찰칵찰칵'한 노크감,
무엇보다 버튼 끝에 달린 '은색 금속 로고'!!

'그래 너라면 제트스트림을 품을만 하겠다'

핫트랙스 문구점으로 가 제트스트림 D1 규격(SXR-200) 리필심을 사, 원래 들어있던 카웨코 볼펜심과 갈아 끼웠다. (하나에 3000원, 온라인 최저가는 1800원쯤 한다)

일반 제트스트림은 0.38, 0.5, 0.7, 1.0mm인데
D1은 0.5, 0.7mm 뿐이다. (모델명은 SXR-200-05, SXR-200-07)

카웨코 볼펜심(위)과 제트스트림 리필심. 미세한 길이 차가 있으나 호환엔 전혀 문제없다.
심 교체는 앞머리 부분을 돌리면 된다.

심 교체는 매우 간단하다.
머리를 풀고 새 심을 쏙 끼우면 끝이다.


카웨코 블루 1.0(위)과 제트스트림 블랙 0.7으로 쓴 글씨. 카웨코도 부드러우나 좀 흐리고 중간중간 끊긴다.

카웨코와 제트스트림의 조합!

이렇게 단돈 7만원에
마음에 쏙 드는 인생볼펜을 갖게 됐다.


사실 바디는 취향에 따라 무엇이든 좋다.

핵심은 제트스트림과 함께 하느냐일뿐.


p.s

새 펜을 장만하면서 그간 멀리 해왔던 필사를 하고있다. 노트북만 두드리느라 잊고 있었던 '쓰는 맛'이 손 끝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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