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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06. 2022

찰스 섬너와 의회 난투극

[사람과 사상] 1월 6일

1856년 5월 22일 미국 연방 의회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하원의원 한 명이 상원의원 하나를 때려눕히고 매질을 가한 것! 하원의원은 쇠가 달린 나무 회초리로 상원의원 머리를 연타했고, 피를 흘리던 상원의원은 곧 정신을 잃었다.


전자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대표했던 프레스턴 브룩스, 후자는 매사추세츠 주의 찰스 섬너였다. 


사진 출처: ABA Journal 



어쩌다가 심의와 토론의 전당인 의회에서 이런 난투극이 벌어졌을까? "노예제"를 둘러싼 정당들 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제 확산"에 대한 다툼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노예제를 유지하던 남부에서 강세였다. 민주당의 오랜 적수 휘그당은 심각한 분열로 공중분해했고, 새로이 공화당이 창설되어서 노예제 확산을 저지하는 세력을 결집하던 차였다. 당연히 브룩스는 민주당, 섬너는 공화당이었다. 


브룩스가 섬너에게 테러를 가한 연유는 대략 이렇다. 섬너는 5월 19일과 20일 의회에서 후에 "캔자스에 대한 범죄"라고 불리는 연설을 한다(아래 링크를 누르면 구글에서 원문을 바로 볼 수 있다). 연설에서 그는 노예제 존치와 확산을 주장하는 남부를 맹비난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두 명의 의원을 실명으로 공격했다. 첫 번째 인물은 우리에게 링컨의 맞수로 잘 알려진 일리노이의 스테판 더글라스고, 두 번째 인물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앤드류 버틀러였다. 더글라스는 2년 전인 1854년에 유명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을 쓴 장본인이고, 버틀러는 상원에서 더글라스에 동조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https://www.google.com/books/edition/The_Crime_Against_Kansas/agwxPmo1zYwC?hl=en&gbpv=1&printsec=frontcover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그 당시 새로 연방 가입을 원했던 캔자스와 네브래스카가 노예주가 될 것인지 자유주가 될 것인지를 연방의회가 결정하는 대신에 각 준주(準州)가 민주적인 인민 주권의 원칙에 따라서 재량껏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언뜻 들으면 사뭇 민주적이고 바람직한 방안 같을 수 있겠다만, 결과는 처참했다. 노예제 확산 문제를 놓고 각 정치 세력들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캔자스와 네브래스카는 곧 전쟁터가 되었다. 


이것이 섬너가 위 연설에서 더글라스와 버틀러에게 비난을 퍼부은 배경이다. 섬너는 이들에 대한 인신공격 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그 회의장에서 연설을 듣고 있었고, 버틀러는 자리에 없었다. 그럼 브룩스는? 브룩스는 버틀러의 조카였다. 그는 섬너가 자신의 집안을 모욕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소동이 있고 나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더욱 유명세를 탔다. 그 힘으로 브룩스는 바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이듬해에 갑작스러운 기관지 병을 얻어 대단히 고통스럽게 앓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실신까지 했었던 섬너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했고, 남북전쟁과 전후 재건기 거의 막바지까지 "급진 공화당" 세력의 중추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의 공화당 내 "급진" 세력을 생각하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 시절 "급진 공화당"의 목표는 모든 인종에게 완전한 정치적, 법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표를 섬너만큼 일관적이고 단호하게 추진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평등주의의 기수 찰스 섬너가 1811년 1월 6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Charles Sumner (1811-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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