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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13. 2022

호레이스 알렌과 한국계 미국인의 날

[사람과 사상] 1월 13일

2003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는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 100주년을 치하하는 성명을 냈다. 2년 뒤, 미국 연방의회는 1903년 102명의 조선인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던 1월 13일을 '한국계 미국인의 날'로 기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뒤로 미국 곳곳의 한인들은 1월 13일을 기념하며 여러 행사를 연다. 내가 필라델피아 근교에 살 때 오래 알고 지냈던 데이비드 오라는 한국계 필라델피아 시 의원도 매년 1월 13일을 각별히 기념하느라 열심이다. 주미 한국대사관과 미주 한인재단 워싱턴 지부에서도 큰 행사를 열 계획이다.


'한국계 미국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 안내


그런데 조선인들은 왜 하와이로 갔던 것일까? 물론 잘 알려져 있듯이 그 100여 명의 조선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간 저임금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왜 하필 1903년이고 어째서 하와이였을까? 누가 이런 이민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민 절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간단히 말해서, 1903년 조선인 노동자 102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은 당시 미국 관련 법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엄연한 불법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질문에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모든 과정에 큰 역할을 차지했던 미국인 한 명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이다.


19세기 말 하와이 경제의 핵심은 사탕수수 농업이었다. 1895년에 결성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연합(The Hawaiʻian Suger Planters Association)은 하와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압력단체였다. 농장주들은 이미 중국, 일본, 포르투갈, 오키나와, 러시아 등지에서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고 있었다. 이들이 20세기에 들어서서 조선인들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까닭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와이에 이미 자리를 잡았던 일본, 포르투갈, 중국 이민자들 | 사진 출처: 하와이 GenWeb 프로젝트


우선, 1898년 8월에 하와이 왕국이 무너지고 하와이가 이제 미국 연방법이 적용되는 미국령이 된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와이가 정식으로 미연방의 주로 승격된 것은 1959년이다). 19세기 말에는 미국 연방법 상의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1882년에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막는 '중국인 추방법'이 통과되고, 연이어 추가 조치들이 가해졌다. 둘째, 1885년에 '외국인 계약 노동법'이 통과되면서 사용자가 외국인 노동자를 미리 고용하여 국내로 불러들이는 일이 금지되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어느 한 노동자 집단이 전체 노동력을 장악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들을 불러들였었는데, 위의 두 연방법이 하와이에 적용되자, 중국인들의 유입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일본인 노동자들이 절대다수가 되어 노동시장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는 것을 막기 힘들 게 되었다. 1900년이 되면 중국인 노동자들의 수는 25,000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일본인 노동자들의 수는 60,000명이 넘게 늘어났다. 게다가 이제 하와이가 미국의 준(準) 주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서 가장 가까운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하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그렇다면 불만을 품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임금 수준이 두 배 가량이 되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일도 더 잦아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장주들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조선이었다.


당시 알렌은 주조선 미국 공사였다. 미국 고향을 방문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알렌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연합 대표들이 접선했다.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에서 가진 몇 차례의 만남에서 이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불러 들일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강구하고자 했다. 알렌은 긍정적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미국과 조선 간의 교역 확대를 누구보다도 원했던 사람이었다. 농장주들이 경제적인 이유에서 조선인들을 싼 값에 고용하고자 했다면, 알렌은 정치적, 외교적 목적에서 조선인들의 미국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것이다. 알렌이 없었다면, 조선인 하와이 이민 프로젝트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여러 난관들을 그가 하나씩 해결해 나갔기 때문이다.


호레이스 뉴튼 알렌 (1858-1932) | 사진 출처: 코리아타임스


무엇이 난관이었나? 당연히 '외국인 계약 노동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인들에게 일정 기간 고용을 미리 보장하고 교통비를 미리 지급하지 않은 채로 그들을 하와이로 불러 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것이 그 당시 사업자들이 외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구하던 방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자 미국 내 토착 노동계급의 반발이 거세진 것이고 그 결과 생긴 것이 '중국인 추방법'이나 '외국인 계약 노동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미국 내 사업자가 외국인 노동자들과 미리 고용계약을 맺는 일도, 그 노동자들의 뱃삯을 미리 내주는 일도 모두 불법이었다. 알렌과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외국인 계약 노동법'에 저촉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해법은 이랬다. 알렌은 우선 고종을 설득했다. 조선의 노동력을 하와이로 수출하는 것이 조선과 미국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 것이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이 금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국인이 할 수 없는 것을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상황의 특수성도 강조했다. 조선에는 이미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미 기독교가 꽤 널리 전파되어 선교사들의 나라인 미국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고종의 윤허가 떨어지자, 이런 이들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을 꾸리는 한 편, 이민을 보내본 적이 없는 조선 정부를 도와 이민국 신설 등 출국 수속 절차를 마련하고 제도를 정비했다. 모델로 삼은 것은 당시 일본의 정책들이었다. 미국의 대표로 조선에 파견된 외교관 신분으로 알렌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한 것도 사실 불법이었다.


동시에 알렌을 자신이  알고 지내던 데이비드 데쉴러(David Deshler) 하여금 조선에 은행을 하나 세우게 했다. 은행이 맡은 일은 오직  가지, 하와이행을 선택한 조선인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일이었다.  돈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은 뱃삯을 치르고 얼마 간의 지참금을 챙겼다. 물론  돈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 연합의  은행에 맡긴 돈이었다.  농장주들 대표가 미리 조선에 건너가서 노동자들과 계약을 맺고 쉴러가 설립한 은행을 통해서 이들에게 자금도 건네주었지만, 표면 상으로는 미국 회사와 얽혀 있는 아무런 계약 관계가 없는 일군의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자비를 써서 하와이행 배를 타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미국 연방 법망을 피하기 위한 묘수이자 꼼수였다.


당연하게도, 알렌은 자신이 벌인 일을 미국 본국에 숨겨야 했다. 알렌은 국무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간다는 정보는 입수했지만, 지난날 중국 노동자들이나 일본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미국에 대거 이주한 것 같은 걱정거리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객관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다행히 미국 정부나 노동계가 반발하고 나선 일은 없었다.


1902년 12월 22일, 그렇게 모집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인천을 떠났다. 이들은 일본에 들러 갤릭호(SS Gaelic)라는 이름의 증기선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03년 1월 13일, 남자 56명, 여자 21명, 어린이 25명, 총 102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하와이는 미국 내 조선인/한국인 이민자들의 중요한 본거지로 기능한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의 미국행이 중단될 때까지(1910년부터 1924년까지는 다시 재개되었다), 하와이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는 7,843명에 달했다.



하와이의 한인들 | 사진출처: 하와이 매거진


참고로 연세대학 내의 알렌관이 바로 호레이스 알렌의 이름을 딴 건물이다. 연세대는 특별히 알렌을 기억할 이유가 있는데, 알렌이 바로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여 훗날 세브란스 병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병원의 이름이 세브란스인 것은 병원을 지을 때 거금을 기부했던 한 석유 갑부의 이름이 세브란스(Louis Henry Severance)였기 때문이다. 알렌과 세브란스 모두 오하이오 주 출신 장로교 신자다.



연세대 신촌 캠퍼스 내의 광혜원과 세브란스 병원 | 사진 출처: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그렇다면, 알렌은 어떻게 조선에 현대식 병원을 세울 수 있었나? 이 이야기는 별도로 긴 설명이 필요하다. 간략하게 말하면 1884년 갑신정변 당시에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알렌이 긴 수술 끝에 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알렌은 개화파 주역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집을 물려받아 그곳에 광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홍영식은 정변 실패 후 능지처참을 당했고 거의 모든 가족이 자결했다. 여담으로 민영익과 홍영식은 갑신정변이 있기 한 해 전에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함께 방문했었다. 민영익이 전권대사, 홍영식이 부사였다. 그때 두 사람의 비서로 동행했던 서광범도 갑신정변의 주요 인사였다. 보빙사의 미국인 통역관이었던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은 홍영식을 가리켜 "신의가 두터운 친구, 진정한 애국자, 정치적 순교자"라 칭한 바 있다. 로웰은 조선에게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별칭을 준 인물이다. 후에 보빙사와 개화파 이야기는 또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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