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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Apr 06. 2022

토마스 홉스와 정치사상 공부

[사람과 사상] 4월 5일

마키아벨리와 함께 근대 정치철학을 정초한 사람, 보댕과 함께 근대 주권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 그로시우스와 함께 근대 사회계약론을 유행시킨 사람, 절대적 전제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 경험주의자면서도 합리주의자, 기독교인이지만 동시에 무신론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람, 그리고 영어로 된 최고의 정치철학서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1588년 4월 5일에 태어났다.



Thomas Hobbes, 1588-1679 | 사진 출처: 영국 내셔널트러스트콜렉션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홉스가 차지하는 위치는 뚜렷하다. 어쩌다 정치사상을 공부하게  나에게도 홉스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홉스의 글을 처음 직접 접한 것은 대학에서 <근대서양정치사상>이라는 수업을 수강할 때였던  같다. 수업 교재는 조지 서바인이  해설서였지만, <리바이어던> 직접 읽어 보고 싶었는데, 한국어판은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절판된 판본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해서 보니 일본어를 거친 중역이었고 요즘에는 상상하기 힘든 세로 쓰기로 되어 있었다. 구내 서점에서 미국 W.W. Norton 출판사에서 나온 <리바이어던> 원서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판본의 편집자가 리처드 플라스먼이어서 더욱 반가웠던  같다. 지난 2015, 플라스먼 교수가 타계했을  짧게 단상을 적어본 적이 있었는 , 그것을 여기에 옮겨 본다. 플라스먼은 홉스에 대한 좋은 연구서를 쓰기도 했는데, 마이클 오크숏과  마티니치의 글들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홉스 해석이다.



Richard E. Flathman, 1934-2015 | 사진 출처: 존스 홉킨스 대학 정치학과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던 학자 한 분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사실과 계보에 관심을 가지는 내 천성 탓에, 또 사람을 통해 사상을 배우던 습성 탓에, 내가 정치사상을 처음 배웠던 함재봉 선생님의 유학 시절 스승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플라스먼은 그렇게 해서 내가 알게 된 학자 중 한 명이었다. 홉스를 처음으로 영어로 읽었을 때, 내가 썼던 판본이 당시 학교 서점에서 구입했던 노턴 크리티컬 에디션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플라스먼이 그 책의 편집자이기도 했다. 이 판본은 물론 캠브리지 판이나 펭귄 판만큼 널리 읽히지 않지만, 필머 경이나 몽테스큐 같은 이들의 리바이어던 리뷰가 짧게나마 발췌되어 있는 등의 분명한 장점이 있었던 기억이다.


홉킨스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사상을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다. 나는 지금의 홉킨스 학파를 일군 사람들 중에 빌 코널리보다 플라스먼을 더 좋아했다. 자유주의를 (혹은 자유 자체를) 이해하는 방법과 결이 무척 다층적일 수 있다는 점을 그로부터 배웠다. 이점에서 대단히 유익한 한 명의 사상가를 더 꼽으라면 같은 세대에 속하는 조지 케이텁을 들 수 있겠다. 플라스먼 식의 자유주의는 미국서도 귀한 입장이다. 물론 한국에는 거의 완전히 부재한다고 보면 대체로 맞는 말일 것이다.


2002년쯤이었나, 나는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학부생이었다. 그때까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그즈음에 사관학교 교수요원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었던 것 같다. 나는 무지하고 순진했다.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어느 선배 하나가 그렇게 군 복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뒤, 막연하게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그저 짐작했으니까. 나중에 막상 교수요원으로 복무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임용에 얼마나 큰 운이 따랐는지를 알고 감사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거나 그 맘때 나는 미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길지 않은 일정이었는데 늘 그렇듯이 주변의 대학을 좀 둘러보고 싶었다. 그때 찾았던 학교가 마침 근처에 있던 홉킨스였다.


날은 더웠고, 학교는 한산했으나 곳곳에 공사가 한창이라 좀 어수선했다. 정치학과가 있는 건물에 그냥 한 번 가보고 싶어 묻고 물어서 찾아간 곳, 이런저런 게시물을 훑어보다, 플라스먼 연구실 앞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이미 그 당시에 한국으로 치면 은퇴한 명예교수의 나이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방 문을 조심히 두드렸고, 마치 오수를 즐기고 있었던 듯 한 모습의 플라스먼이 문을 열고 나와 불청객을 맞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무례한 방문에도 흔쾌히 시간을 내어 나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 주었는데, 그 모습이 나에겐 오랫동안 미국 노학자의 전범으로 머리에 남았다. 이야기의 말미에 예전에 가르쳤다는 한국 학생 이름을 내게 알려 주었는데, 한국어 발음이 서툴러서 내가 잘 알아듣지 못했고 결국 1년도 더 지나서야 우연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우연히 알게 된 경험도 있다. 그 후에 플라스먼 교수를 한 번 더 직접 마주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도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한참 , 사관학교에서 나와 같은 학과에서 강의하시던  중에 최범식 교수님이 계셨는데,  분이 전역   교수로 계속 가르치시다가 완전히 학교를 떠나시게 되면서 소장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플라스먼이 70-80년대에 출판했던   권을 발견하여 손에 넣고는 무척 좋아했었다.


뚜렷하고 독특한 자기 입장이 있었던 좋은 학자가 또 한 명 떠나고 이렇게 한 세대가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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