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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Apr 16. 2022

모순적이고 위대한 정치인의 죽음

[사람과 사상] 4월 15일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일리노이가 제2의 고향이 된 사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주 의회와 연방 의회에서 결코 길지 않은 입법 활동을 마치고 대권에 도전한 사람.
입법 활동 시, 주류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의 상식에 반하면서까지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고 당시 큰 지지를 받던 전쟁의 부도덕함을 용기 있게 지적한 사람.
상대적으로 승산이 적은 당내 경선에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재선에도 성공한 사람.
경선 당시 치열하게 싸웠던 본인보다 더 유명하고 경험 많은 경쟁자(뉴욕 주 상원의원)를 취임 후 첫 국무장관으로 기용한 사람.
반대파로부터 때로는 줏대 없는 중도 지향 정치인으로, 때로는 과격한 진보주의자로 비판받고 매도되곤 했던 사람.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고양시켰던 뛰어난 연설가.





미국 전직 대통령 중에서 위의 설명에 부합하는 이력을 가진 사람은 사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다. 한 사람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 다른 사람은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다. (여러모로 정말 다른 두 사람의 놀랄만한 공통점에 대해서는 차후에 따로 논하도록 하겠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셋 중에 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 링컨이 1865년 4월 15일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 전인 4월 14일 워싱턴 D.C. 에 있는 포드 극장에서 존 윌키스 부스가 쏜 총에 맞은 지 약 9시간 만이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연방의 지도자로서, 또 4백만 명이 넘는 흑인 노예들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기초를 설계한 사람으로서 암살을 당했다. 링컨이 살아남아 두 번째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면, 전후 남부 재건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링컨의 부통령이었다가 얼떨결에 대통령 직을 맡게 된 테네시 출신 민주당원 앤드류 존슨은 공화당 연방의회가 주도하는 남부 재건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으며, 그 때문에 남부에서 기존 백인 노예주들 세력이 훨씬 더 용이하게 되살아 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링컨은 암살당했기 때문에 까다로운 전후 재건 과정으로부터 해방되어 곧바로 영웅이자 순교자로 추대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은 링컨을 ("건국의 아버지들"과 함께) 정치, 문화적 구심점으로 소비한다. 링컨의 말은 (종종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는 데도) 누구나 필요에 따라 인용하는 일종의 "성경" 구절이 되었으며, 워싱턴 D.C. 에 있는 링컨기념관은 일종의 "성전"이 되었다.


미국인들조차도 남북전쟁을 노예제를 놓고 북부와 남부가 벌인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부는 노예해방을, 남부는 노예제 존속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링컨을 노예를 해방시킨 위대한 해방자로 기억한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하게 맞는 설명도 아니다. 노예제는 분명 남북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였지만, 노예제를 없애기 위해서 북부가 전쟁에 나선 것은 전혀 아니었다.


물론 링컨은 오래전부터 노예제를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제도로 간주했다. 그러나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서 그는 연방정부가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를  철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연방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주(州)'의 지위를 얻지 못한 준주(準州)들을 통제하는 것뿐이었다.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주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늘 있었다. 독립전쟁 후 영국과 맺은 파리 조약의 결과로 얻은 오대호 이남의 미시시피 강 동쪽, 오하이오 강 북쪽 영토들부터, 1803년에 제퍼슨 당시 대통령이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입한 '루이지애나'(이후 15개 주가 이 영토에서 만들어진다),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얻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남부의 영토에 이르기까지, 모두 개발 후 처음에는 준주가 되었다가, 일정 기간 뒤에 주로 승격하는 절차를 밟았다.


헌법에 따르면 준주를 규제, 관리하는 책임은 연방의회에 있기 때문에, 연방의회를 통해 준주에서의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은 절차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전쟁 전 링컨을 비롯한 많은 북부인들은 노예제 자체의 철폐를 주장했다기보다는 노예제가 서부의 준주들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예제 서부 확산 반대" 아예 당론으로 확립하여 세를 모은 신생 정당이 바로 공화당이었다. 물론 남부에서는 이에 극렬히 반대하며 링컨과 같은 온건 공화당원도 남부의 재산을 위협하고 언제든 -노예제 음모를 꾸밀 극렬 폐지론자로 여겼고, 공화당 집권을 상상할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186011월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 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남부의 7개의  방을 탈퇴하고 새로 남부연합을 꾸리게  배경이다.


링컨은 1861 3 취임 연설에서 연방 탈퇴는 절대 인정될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도, 본인은 남부에 이미 존재하는 노예제를 간섭할  있는 아무런 권한도 없으며 그럴 용의는 더더욱 없다고 역설하면서 연방 회복에 동참할 것을 남부에게 촉구한다. 얼마 후인 4 섬터 요새 공격받으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도 북부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반란 집압, 헌법 수호, 연방 수호였다. 링컨은 바로 이러한 목표로 7 5천의 연방군 처음 꾸렸다.


많은 전쟁이 그렇듯이, 남북 전쟁도 장기화되면서 성격이 전면전으로 진화했다. 전쟁이 시작될 당시에는  전쟁이 앞으로 4년 동안 총  62 명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링컨은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이 남부의 무조건적인 항복이 있어야만 끝날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부를 전면적으로 정복해야 했다.  와중에 나온 것이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이다.


링컨은 1862 9 22 노예 해방 선언을 예고하고, 1863 1 1 예고된 바대로 선언을 공표했다. 중요한 것은 링컨의 해방 선언이 효력을 가지는 지역이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11 (그중 몇몇 주는 일부 제외 지역도 있었다) 제한되었다. 다시 말하면, 노예제를 유지하면서도 연방으로부터 탈퇴를 감행하지 않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메릴랜드, 델라웨어, 미주리, 켄터키 등의 지역의 노예들에게는 노예 해방이 적용되지 않았다.



링컨 얼굴의 변화. 전쟁을 이끄는 최고사령관의 고통과 고뇌의 흔적이 한눈에 보인다. | 사진 출처: www.civilwarprofiles.com


게다가 노예 해방 선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대통령이 공표한 선언이었으며, 선언이 집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제반 조건이 마련되어야 했다. 북부가 승리를 거둔 남부 지역에 사는 흑인 노예들은 노예 해방 선언이 현실로 실현되는 감격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북부군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링컨의 선언이 힘을 갖기 어려웠다. 한 예로, 지난 2021년부터 미국 연방 공휴일이 된 "준 틴스"(Juneteenth)는 텍사스의 갤브스튼(Galveston)에서 연방군 소장 고든 그레인저가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에 의거하여 6월 19일(June nineteenth)에 그 지역 노예제의 종식을 선언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때는 1865년이었다. 그러니까 링컨의 선언이 텍사스 어느 마을에서 효력을 갖게 되기까지 거의 2년 반의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노예 해방 선언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법적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전쟁 최고 지휘관 지위였다. 그러니까 링컨은 전쟁의 지휘관으로써 적의 재산인 노예를 아군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했다. 특정 지역의 노예를 해방시킬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노예를 재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링컨은 노예해방 선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북부인들에게 그의 결정이 군사적인 결정이라는 점을 줄곧 강조했다. 자신의 결정은 적에게 봉사하는 노예들의 노예 신분을 무효화하고, 그들이 아군을 위해 봉사할  있는 길을 만들어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18  정도의 흑인들이 북부군을 위해 싸웠는데, 그중  80% 해방된 노예들이었다.


따라서 남북전쟁을 노예해방 전쟁으로 만든 것은 전쟁  자체였다. 전쟁의 성격이 변함에 따라 링컨의 정치적 계산과 판단도 달라졌고, 전쟁 말엽이 되면 대통령 링컨 입장에서는 연방군이 노예제라는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숭고한 자유를 위해 전쟁을 완수한다는 설명 외에는 그때까지의 수많은 희생을 설명하고 설득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링컨은 미국이 낳은 위대한 대통령이다. 그가 위대한 까닭은 도덕적 순수함이나 일관된 정책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사상가이자 사회학자, 역사학자였던 두 보이스(W. E. B. Du Bois)는 링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 바 있다.


그는 모순을 품을 만큼 위대했다. 잔인했으나 또 관대했고, 평화를 사랑했으나 투사였으며, 흑인들을 깔보았으나 그들에게 참전(參戰)과 참정(參政)의 기회를 주었으며, 노예제를 보호했으나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는 한 인간이었다. 위대하고, 모순적이고, 대담한 사람이었다.


적확한, 최고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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