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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Apr 24. 2022

버커넌: 준비된, 실패한 대통령

[사람과 사상] 4월 23일

1791년 4월 23일 훗날 미국의 15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버커넌(James Buchanan)이 펜실베니아 주 중남부 코브 갭에서 태어났다. 내 경험 상 버커넌의 성을 제대로 발음하는 미국인들은 아주 드물다. 대부분 "뷰캐넌"으로, "캐"음에 강세를 주어 발음한다. 정확한 발음은 "버커넌"으로 강세는 가장 앞에 온다. 미국 정치를 전공하거나 대통령 역사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학자들조차도 자주 틀리는 부분이다.


"전직" 대통령 중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직 버커넌이 유일하다. 물론 곧 한 명이 추가될 것이다. 현 대통령 조 바이든이 펜실베니아 주 스크랜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버커넌이 유일한 대통령인 부문이 있다. 바이든 현 대통령을 포함하여 45명의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버커넌만이 유일한 총각 대통령이다. (그로버 클리브랜드도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때는 총각이었지만, 약 1년 뒤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참고로 홀아비 대통령은 7명 있었다. 토마스 제퍼슨, 앤드류 잭슨, 마틴 밴 뷰런, 체스터 아서는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시작하기 전에 상처했으며, 존 타일러, 벤저민 해리슨, 우드로우 윌슨은 임기 중에 부인을 잃었다. 셋 모두 곧 재혼했는데 타일러와 윌슨은 남은 임기 중에 재혼했다.)


버커넌은 아마도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일 것이다. 버커넌 다음에 대통령이 된 에이브라함 링컨이 워낙 영웅으로 칭송을 받게 된 까닭에 버커넌의 모든 행보는 잊히거나 평가절하되는 것이 보통이다. 재직 시절 노예제 확산 찬/반을 놓고 양극화가 심해질 때, 갈등이 계속 증폭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버커넌의 무능력이 상식처럼 전제가 되다 보니, 그가 얼마만큼 준비된 대통령이었는지 간과되기 일쑤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버커넌처럼 국정 경험이 풍부하고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이는 찾기 힘들다. 그는 펜실베니아 주 의원에서 시작하여, 오랜 시간 연방하원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일했고, 러시아와 영국에 미국 대사로 갔었는가 하면, 국무 장관으로 영국과의 외교를 통해 오레곤 영토를 확실하게 지켜냈으며, 멕시코와 구아달루피-이달고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영토를 확보하는 데 큰 기여를 했었다. 그만큼 풍부한 경험을 가진 대통령은 아마도 존 퀸시 애덤스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 버커넌은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노예제 확산 문제를 각 주가 해결하도록 한다는 그의 기본 노선은 현실적으로 남부 노예주들의 힘을 키우고 북부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갈등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연방정부의 "정치" 역할을 축소하고 드레드 스콧 사건을 통한 "사법적" 해결에 기댄 것 역시 큰 패착이었다. 결과적으로 1860년 11월 대선은 공화당 링컨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 해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남부의 7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퇴임을 앞둔 버커넌은 갈라지는 연방을 지켜보았다. 봉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그가 추진한 코윈 헌법 수정안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따로 다룬 바가 있다. "수정헌법 13조와 노예제의 운명"), 역부족이었다.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준비되었던, 그러나 결국 정치적으로 실패한 대통령의 말로였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버커넌 대통령 간의 전보 서한 | 사진 출처: 미의회도서관


보론: 남북전쟁의 경과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하나가 영국의 반응이었다. 영국은 이미 캐나다에 주둔하는 병력을 높이며 미국의 내전 추이를 상세히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이 남부연합을 하나의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면, 역사의 향방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남부군을 이끌던  장군이 수비의 이점을 포기하고 앤티텀과 게티스버그에서 공세를 펼쳤던 이유  하나는 영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라도 D.C.  가까운 지역의 북부군을 압박하면서 승기를 잡는 인상을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역사학자들은 영국이 끝내 남부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이유로 버커넌과 빅토리아 여왕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꼽는다. 영국 대사 시절부터 버커넌이 영국과의 관계를  다져 놓았다는 설명이다. (위의 사진에 나오는 두 사람 간의 전보 서한은 대서양 해저 케이블을 이용한 최초의 전보 통신이었다. 메시지를 받고 해독하는데 16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한 주 이상 소요되었던 편지 왕래에 비해 대단한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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