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7월 29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알렉시스 샤를르 앙리 클레렐 (Alexis Charles Henri Clérel)이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토크빌 백작이었기 때문에, 그도 "comte de Tocqueville"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흔히 토크빌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정치가이자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토크빌은 백작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거부했지만, 귀족 출신으로 누릴 수 있었던 특권들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노르망디에는 아직도 토크빌 성이 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성은 그의 남동생의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다.)
Château de Tocqueville
토크빌이 살았던 시기는 가히 혁명의 시대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대혁명으로 부르봉 왕정이 무너진 뒤 프랑스는 여러 정치 실험과 혼란을 경험했다. 입헌 공화정이 들어섰다가 쟈코뱅의 공포정치가 곧 시작되었고,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전세가 역전되더니 결국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제정을 건설했다. 나폴레옹이 물러나며 부르봉 왕정이 재건되는가 싶더니 곧 오를레앙 공 루이-필립에 의해 부르주아 입헌군주제가 실험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이 체제가 다시 무너지고 곧 공화정이 시작되었으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스스로를 나폴레옹 3세로 선포, 프랑스는 다시 제정으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혼란은 보불전쟁 뒤 제3 공화국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토크빌은 이 혼란의 일부를 몸소 체험했다. 그는 여러 정치체들의 설립과 전복이 계속되는 와중에 꾸준히 진행되던 사회의 민주화를 포착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흐름을 무작정 외면하거나 그것에 섣불리 열광하지 않았다. 그가 여타 귀족 출신 사상가/정치가들과 급진 개혁가들 모두와 다른 대목이다. 토크빌의 관찰과 통찰 역시 물론 여러 한계가 있지만, 추상적인 정치/사회 이론 고안에 목적을 두지 않고 정치 현실을 제대로 목도하고자 한 그가 남긴 여러 대작들은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다. 토크빌은 1831년 5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친구 구스타브 드 보몽과 함께 미국을 방문, 시찰한다. 맡은 임무는 당시 미국의 선진 감옥 시스템을 보고 배우는 일이었지만, 토크빌은 뉴 잉글랜드 지역에서부터 뉴 올리언스, 또 미시간 호 서안까지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미국 사회 전반을 관찰한다. 귀국 후 1835년에 미국 사회 전반과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점과 결점을 강조한 <미국의 민주주의> 1권을 출판했고, 1840년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중한 분석과 미래에 대한 예측을 담은 2권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