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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Jan 29. 2024

한국의 첫 '박사'들

[사람과 사상] 서재필부터 함병춘까지

현대 역사 인물 중에 한국인들이 유독 '박사' 호칭을 붙여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재필 박사, 이승만 박사, 장면 박사, 조병옥 박사, 함병춘 박사 등이다. 이 분들은 모두 미국에서 공부했고 서로 이런저런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꼼꼼하게 주목할만한데, 세간에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도 꽤 많이 퍼진 것 같다. 아래에서는 특별히 이들이 받은 학위와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간략히 적어 둔다. 후에 관련하여 더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만 58세의 서재필의 모습


I.


서재필(1864-1951)은 1892년 3월 17일, 콜럼비안 대학교의 국립 의과 대학(National Medical College of the Columbian University)을 졸업하고 의무박사(Doctor of Medicine)를 취득한다. 이곳은 현재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 대학이다.


함께 졸업한 동기생은 23명이었다. 명단에 기재된 그의 출신지는 “펜실베이니아”였다. 그는 유일하게 펜실베이니아 출신이었던 동기생 와그너 박사(Robert S. Wagner)와 가깝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와그너 박사는 졸업 후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갔고, 서재필은 워싱턴 D.C. 에 남았다. 그런데 같은 해 7월에 그가 펜실베이니아로 여행하여 와그너 박사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서재필 졸업 동기 중에는 홍일점이자 그와 동갑내기였던 아니타 뉴콤 맥기(Anita Newcomb McGee) 박사도 있었다. 맥기 박사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캐나다 출신 사이먼 뉴콤 교수(이 사람은 저명한 수학자 벤저민 퍼스의 제자였다)의 딸로 워싱턴 D.C. 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의과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서 수학한 적도 있었던 재원이었다.


Dr. Anita Newcomb McGee (1864-1940)


아니타 뉴콤은 1888년에 지질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윌리엄 맥기(William J. McGee)와 결혼하여 맥기 성을 얻었고, 남편의 동의와 후원으로 1889년 의과 대학에 진학했다. 의대 재학 중에 첫 아이 딸을 낳기도 했으며, 서재필과 같은 해에 의대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는 D.C. 에서 개업의를 했었고 이후 미서전쟁이 일어나자 유일한 여성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맥기 박사가 맡은 일 중에는 군대 내의 간호사들을 관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전후에 상설 간호대를 창설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으며 미서전쟁 간호사회를 꾸려 활동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맥기 박사가 이끄는 미서전쟁 간호사회 회원 일부가 일본을 돕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는 사실이다. 맥기 박사는 일본 본토뿐 아니라 조선의 안동, 만주 등을 방문하며 일본 간호사들 훈련과 병원 점검 등에 힘썼다. 서재필은 그 시절 스스로를 일본 출신으로 내세운 경우가 꽤 있었는데, 그가 맥기 박사에게 어떤 영향을 주진 않았을까?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는데, 내가 아는 한 서재필과 맥기 박사 간의 있을 법한 교류에 관한 직접적인 연구는 아직 전무하다.


II.


이승만(1875-1965)은 서재필이 공부했던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1907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의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던 것의 학점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대학을 2년 반 만에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사사하기도 했었다.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는데, 여러 사정 끝에(관련하여 나중에 적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학교를 옮겨서 1910년 6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이승만의 전공은 국제법이었고, 두 가지 하위 주제는 미국사와 철학사였다. 논문 심사는 당시 학부대학 학장이었던 엘리엇(Edward Elliot, 정치학) 교수와 맥엘로이(Robert McNutt McElroy, 역사학) 교수 두 사람이 맡았고, 졸업 열 하루 전에 치렀던 구두시험에는 엘리엇, 맥엘로이 두 교수와 더불어 오어먼드(Alexander Thomas Ormond, 철학) 교수도 참여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원 과정 중에 이 세 사람의 수업만을 수강했다.


이승만 박사의 지도 교수였던 엘리엇 교수는 1910년 4월 14일 당시 프린스턴 대학원장이었던 웨스트(Andrew Fleming West, 고전학)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의 학위논문이 통과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고 평했다. 엘리엇 교수가 보기에는 해당 학기에 이승만이 졸업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승만은 4월 18일 엘리엇 교수와 면담이 잡혀 있었다. 그 면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약 한 달 뒤인 5월 24일 엘리엇 교수가 이승만 논문의 조건부 통과 결정을 웨스트 교수에게 통보했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논문의 뒷부분이 앞부분만큼 좋지 않은데, 그 문제를 해결하면 졸업시켜 줄 수 있겠다는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6월 14일 학위를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참고로 엘리엇 교수는 프린스턴에서 학부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프린스턴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캘리포니아로 건너가서 버클리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이후 학계를 떠나서 연준(Fed)과 사설 은행에서 일하기도 했다. 버클리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1918년에는 그가 프린스턴에서 학부 학장으로 재직할 시절에 총장이었고 1918년 당시에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의 1898년 작 <국가>의 수정-증보판을 도맡아 출판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이승만


여담으로 이승만의 지도교수가 우드로 윌슨이었다거나 이승만이 윌슨의 수업을 수강했다거나 하는 풍문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승만보다 먼저 프린스턴에 와서 윌슨의 수업을 수강한 조선인이 있었다. 1898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노크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던 서병규다. 서병규는 1894년 1월 로노크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1898년 졸업(A.B.) 후 프린스턴으로 가서 1899년에 석사과정을 마친 것(A.M.)으로 보인다.


그의 영문명이 "Kiu Beung Surh"이었던 까닭인지, 한국 정부 고위관리가 작성한 글들을 비롯하여 최근에 그를 "서규병"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꽤 많다. 어떤 경우에는 "서평규"라는 서술도 있으며, 때로는 로노크 대학에서 "서평규"와 "서규병"이라는 서로 다른 두 명이 공부했던 것처럼 설명하는 글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모두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는 서병규(徐丙珪)다.


여담을 조금만 더 이어가자면, 6.25. 전쟁 당시 서병규의 딸 한나가 로노크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전쟁 통에 목숨을 건진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안도한 그의 이야기가 로노크 지역 신문에 실렸다. 그 전 반 세기 간의 그의 행보는 확실치 않다. 1903년 조선인 노동자들의 하와이 이민 수속을 담당했던 유민원에서 총무국장을 맡았던 서병규가 바로 그였던 것으로 보이며, 1920년대 상해에서 중국해관총세무국에서 일했던 유일한 조선인 서병규는 확실히 그가 맞다.


서병규 다음으로 로노크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김규식이다. 몇 달 전 로노크 대학 캠퍼스를 가보니 그곳에 김규식을 기념하는 푯말이 있었다. (그의 영문 이름을 그가 쓰던 방식과 다르게 적어 놓은 것은 좀 불만이었다.)


III.


조병옥(1894-1960)은 숭실과 배재에서 김규식을 사사했었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각지를 누비며 활동하던 이승만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조병옥은 펜실베이니아의 윌크스-배리로 유학을 갔는데, 그보다 30세 연상인 서재필이 거의 30년 전에 같은 곳에서 유학을 했었다.


참고로 윌크스-배리(Wilkes-Barre) 시는 한 도시 이름으로 하이픈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이름(John Wilkes와 Isaac Barré)을 사용하는 유일한 도시면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고장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는지에 관하여 아직까지도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도시다. 현지 사람들 중 "윌크스-바아"와 "윌크스-배어"가 맞다고 여기는 이들도 꽤 된다.


조병옥은 그곳에 있는 와이오밍 학교를 졸업했는데, "와이오밍"이란 이름 때문에 혹자는 조병옥이 현재 미국의 와이오밍 주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와이오밍은 펜실베이니아 주의 와이오밍 유역(Wyoming Valley)을 말한다. 이 지역에 1807년 윌크스-배리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가 1883년 해리 힐먼 아카데미로 개칭되었다. 서재필이 1886-1888년에 다닌 학교가 바로 해리 힐먼 아카데미다. 시간이 흘러 해리 힐먼 아카데미는 윌크스-배리 학교와 통합되었고, 다시 와이오밍 학교(Wyoming Seminary)로 통합되었다. 그러니 넓게 보면 서재필과 조병옥은 학교 동문인 셈이다.


치료 차 미국에 방문하기 직전의 조병옥


조병옥이 와이오밍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할 당시인 1919년 4월에 서재필과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를 열었다. 학생이었던 조병옥도 여기에 참석했다. 조병옥은 후에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전공으로 1925년 박사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1960년 선거를 앞두고 치료 차 미국에 들렀다가 워싱턴 D.C. 에 있는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월터 리드(Walter Reed)는 황열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군의관인데, 서재필이 의과 대학을 마치고 그의 밑에서 세균학과 현미경 검사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황 상 그럴듯한 설명인데 내가 아는 한 근거가 될 수 있는 확실한 자료는 부족한 실정이다.  


IV.


장면(1899-1966)은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메리놀 전교회 신학교를 거쳐 뉴욕의 맨해튼 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1925년 6월 4일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박사로 불리는 까닭은 시간이 흘러 그가 주미대사 시절이었던 1948년에 모교인 맨해튼 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후에도 뉴욕의 포담 대학(1950년)과 세튼 홀 대학(1957년)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장면


내가 대학에서 처음 수강한 "서양철학사" 과목을 가르치셨던 장욱 교수는 장면 박사의 동생인 화가 장발의 아들이었다. 장욱 교수께서 당시 논란이었던 미국 대선(2000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우리말보다 영어와 불어가 더 편해 보였던 것 등이 기억에 남는다.  


함병춘(1932-1983)은 경기중학교를 마친 1951년 말부터 공군에서 15개월 동안 복무(봉급지급 담당)하다가, 1953년 1월에 오하이오 주에 있는 안디옥 대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했다. 그 해 가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로 학교를 옮겼는데 같은 시기에 노스웨스턴에 입학한 사람으로는 당시 연희대학교 총장 백낙준의 차남인 백성익이 있었다.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공부하고 1959년 법무학사 학위(LL. B)를 받는다. 1969년 하버드 로스쿨은 첫 법학 학위로 법무학사 대신에 법무박사(J. D.)를 수여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면서, 이전에 법무학사 학위를 받았던 졸업생들도 법무박사를 소급하여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안디옥 대학 재학 시절의 함병춘


함병춘 박사의 부친은 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다. 4대 부통령은 장면이었다. 함태영 목사는 법관양성소 출신으로 구한말에 한성재판소 판사를 맡기도 했었는데 1898-1899년 당시 황국협회 세력과 맞서던 이승만 등의 독립협회 관계자들이 왕정 전복 혐의를 받을 때 그들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린 바 있었다. 그 당시 독립협회를 세운 일등공신이었던 서재필은 이미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후였다.


함병춘 박사의 장남 함재봉 교수께서 연세대학에서 가르치셨던 "고대중세서양정치사상"과 "근대서양정치사상"은 내 정치사상 공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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