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프로젝트> ⑩ 그리스 뮤지션
비 오는 날 버스를 타면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Rain and tears~(are the same. But in the sun, You've got to play the game~)”의 구성진 목소리, ‘나나 무스쿠리’라는 재밌는 이름과 함께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하며 따라부르던 노래, 또 소프라노 조수미의 목소리와 함께 제목부터 서정적으로 떠오르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등 어쩐지 ‘한국적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어떤 애잔함과 서러움이 묻어나는 이 노래들은 모두 그리스 음악이다.
아주 오래전(1995년!) 교보문고에서 그리스 출신의 뮤지션 야니(Yani)의 팬사인회가 있었다. 당시 야니는 <아크로폴리스 라이브>(Yani Live at the Acropolis)로 뉴에이지 음악계의 최정상을 누리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큰 히트를 쳐 내한공연을 했던 것 같다(아니면 음반 발매 기념차). 오랫동안 줄서기를 하여 사인을 받았는데, 하얀 옷을 입은 야니 아저씨가 사인을 해주면서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뿐만 아니다. 소싯적 <전영혁의 음악세계>나 <성시완의 월드뮤직>같은 심야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좀 들었던 사람이라면, 프로그레시브 음악계의 한 축을 이뤘던 반젤리스(Vangelis)의 신디사이저 음악과 함께 밤을 샜던 그 시간들을 어찌 잊을 것인가?
마치 읽어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듯 먼 그리움의 알싸한 멜랑콜리로 다가오는 그리스 음악이 이토록 우리에게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비슷한 한(恨)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중해 한가운데 산토리니의 하얀 지붕처럼 모든 게 선명하고 아름다울 것 같지만 수천 년을 외세에 의해 나라가 찢어지고 붙여졌다 다시 흩어지는 가혹한 역사를 반복해 오면서 봄보다는 가을, 기쁨보다는 처연한 슬픔에 어울릴 듯한 정서가 그리스 음악에는 묻어 있다. 그리스 음악은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터키, 아랍, 유럽, 아시아에 이르는 동서양의 음색과 리듬이 공존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리스 현대음악의 근간에는 레베티코(Rebetiko/ρεμπέτικο 혹은 렘베티코 re(m)ˈbetiko, 복수형 레베티카 rebetika, 렘베티카)로 불리는 그리스 하층계급의 노래가 있다(그리스의 블루스에 비견되는). 그리스 본토(피레우스)의 민속과 전쟁 참패로 인해 터키에서 강제 소환되어 온 그리스인들의 유산으로 남은 이 음악들은 억압과 시련 속의 민중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는데, 1930년대 중반부터 민속악기 ‘부주키(Bouzouki)'를 비롯해 바글라마, 기타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음악 패턴으로 자리 잡으면서 ‘레베티코’로 정리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레베티코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연구와 변주를 통해 그리스를 대표하는 월드뮤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지난해 작고한 그리스의 국민영웅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1929~2021)와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zidakis,1925~1994)와 같은 음악가들이 있다. 레베티코에 클래식과 서양식 전자음악이 결합하여 ‘예술적(enteknno)’으로 승화,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이들의 음악은 세계 음악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테오도라키스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와 <페드라>, <Z>의 테마곡은 ‘그리스적인 것’에 대한 느낌을 세계인들에게 깊이 각인시켰고, ‘기차는 8시에 떠나네’와 같은 곡은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뿐 아니라 세계 여러 성악가들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하지다키스 또한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가 주연한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의 주제곡으로 아카데미상 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다.
레베티코 전통 중심에서 유럽의 현대음악이 들어오면서 그리스 대중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1974년까지 계속된 그리스 군부 독재정권에 민중의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그리스적 정서가 묻어나는 포크송이거나 전통악기와 현대악기를 적절하게 융합한 노래들이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으로 세계로 나가 명성을 얻은 나나 무스꾸리, 그리스 국민가수 하리스 알렉시우(Haris Alexiou), 그리스의 목소리 요르고스 달라고스(Yorgos Dalaras), 지중해의 존 바에즈라 불린 마리아 파란투리(Maria Frantouri) 등이 있다.
(2019년 ‘Let’s DMZ 피스메이커’ 콘서트에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며 ‘교향곡 제3번’을 헌정, 경기필하모닉 연주로 한국 초연한 바 있고, 마리아 파란투리가 정태춘과 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그리스의 현대 대중음악은 이러한 전통과 역사 위에서 시작했지만 신디사이저와 키보드를 중심으로 한 색다른 음색으로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다.
1967년 결성된 ‘아프로디테 차일드’는 키보드 연주자 반젤리스의 서정적인 연주와 데미스 루소스의 애조띤 보컬이 멋진 화음을 이뤄 그리스 대중음악으로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야니’의 등장은 그리스 발 뉴에이지 음악으로 세계 음악시장에 뉴에이지라는 새로운 물결을 흘려보낸 주인공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미의 여신,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이들을 자처하는 그리스 대중음악의 대표자들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뮤지션들을 소개한다.
그리스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작! 1967년 반젤리스(키보드, 플루트), 데미스 루소스(보컬, 기타), 루카스 시데라스(보컬, 드럼), 실버 클로리스(기타)가 결성한 4인조 밴드다. 첫 앨범 <End Of The World>(1968)에서 3번 트랙 ‘Rain and Tears’(3:10)가 빅히트를 치면서 세계 여러 나라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멜로트론을 사용하여 멜랑꼴리한 장엄함으로 감성적인 사이키델릭 록을 보여주었다.
70년에 발매한 싱글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또한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지만, 3번째 앨범 <666>이라는 프로그레시브 사이키델릭 록의 걸작을 남기고 각자의 개성에 따라 팀은 해체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QyxCL1uMlU&list=RDYQyxCL1uMlU&start_radio=1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건반 연주자이자 작곡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문 음악가로 거듭난 반젤리스(1943~)는 이후 30년 넘게 전자, 프로그레시브, 앰비언트, 재즈 및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세계음악계의 독보적인 아티스트가 된다.
팀 해체 후 1980년대에는 그룹 ‘예스(Yes)’의 리드싱어인 존 앤더슨(Jon Anderson)과 함께 ‘Jon & Vangelis’라는 이름으로 함께 여러 앨범을 발매했다.
가장 잘 알려진 음악 중 하나는 1981년 작곡한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사운드트랙으로 제54회 아카데미 최우수음악상을 수상했다. 이 음악은 2012년 런던 올림픽 수상자 메달 수여식 배경 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와 <1492 콜럼버스(Conquest of Paradise)>(1992)는 <불의 전차>를 능가하는 인기와 큰 감동을 안겼다. 이밖에 칼 세이건의 TV 다큐멘터리 <COSMOS>의 음악을 맡기도 하고, 2001년 NASA의 화성 탐사 계획의 하나인 ‘2001 Mars Odyssey’의 테마 음악으로,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에서 <Mythodea>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a-HfNE3EIo
https://www.youtube.com/watch?v=WYeDsa4Tw0c
데미스 루소스(1946~2015)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그리스 가수로,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전율적인 고음 처리가 특징인 가수다. 친구 반젤리스 등과 함께 그룹 아프로디테 차일드를 결성하여 보컬을 맡았고, 1968년의 ‘Rain & Tears’를 시작으로 ‘I want to live’,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등 연속으로 히트작을 냈다. 팀 해체 이후 솔로로 데뷔해 ‘We shall dance’(1971), ‘Goodbye my love goodbye’(1973) 등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며, 1987년에는 음악생활 20년 결산 ‘Voice and vision’을 발표하였으나 2015년 작고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7UGHxquI6g
시그니처인 검은뿔테 안경으로 잘 알려진 나나 무스꾸리(Νάνα Μούσχουρη, 1934~ )는 12개 이상의 다른 언어로 200개 이상의 앨범을 발매하여 전 세계적으로 3억 5천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여성 아티스트로 꼽힌다.
언어 천재로 다국어 사용 가능자였는데,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만다린 중국어, 코르시카어 등 여러 언어로 유럽, 아메리카 및 아시아 전역에 팬을 두었다.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으로, 1958년 그리스 가요제를 시작으로 1960년 베를린 비엔날레에서 ‘아테네의 백장미’로 상을 받았으면서 국제적 성공을 거듭했다.
가수뿐 아니라 제네바에서 그리스 유럽 대리인으로 활동했고, 유니세프 대사로도 활약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커 내한공연도 여러 번 가진 바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의 음악으로는 번안곡 ‘하얀손수건’으로 알려진 ‘Me T'Aspro Mou Mantili’를 비롯해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Only Love’, ‘Amazing Grace’ 등 여러 레퍼토리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Iq_62JfHw
카리스마 있고 당당한 중저음으로 메조소프라노의 매력을 한껏 발사하는 아그네스 발차(1946~)는 그리스 레프카스섬(Lefkas) 출생으로, 6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아테네음악원에 이어 1965년 마리아 칼라스 장학금으로 독일 뮌헨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68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에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에 케루비노 역으로 데뷔한 이후 중저음의 목소리를 장점으로 주로 남자 역할의 배우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빈국립오페라, 베를린오페라,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코벤트가든 왕립오페라극장 등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오페라 무대 위 디바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다. 특히 비제의 <카르멘>으로 돈 호세 역에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와의 호흡은 전례 없이 훌륭한 듀엣으로 전 세계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고국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 1986년 <나의 조국이 가르쳐 준 노래> 앨범을 발매,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거야(Aspri Mera Ke Ya Mas)’ 같은 노래로 전 세계에 그리스 음악을 알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kJQuWX9RRJ0
작곡가, 피아니스트, 키보디스트 및 음악 프로듀서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야니는 본명이 ‘Yiannis Chryssomallis’로 1954년 그리스 칼라마타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독학으로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야니는 그리스 국가대표 수영선수라는 이색 타이틀도 가지고 있고,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과학, 심리학 등을 전공했다고 한다.
음악가로서는 전자음악 신디사이저와 본격적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결합을 대중화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음악가들과 함께 이국적인 악기를 통합하는 실험을 하면서 소위 ‘뉴에이지 음악계의 구루’로 등장하게 되었다. (본인은 뉴에이지라는 한 장르 속에 가두는 것을 극구 싫어한다고 한다)
특히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아래 고대극장에서 공연된 ‘콘서트 라이브 앳 아크로폴리스’는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뮤직 콘서트 비디오로 기록되고, 이어 인도의 타지마할, 중국의 자금성, 러시아의 크렘린, 레바논의 고대 도시인 비블로스, 튀니지의 카르타고의 로마 극장, 이집트 피라미드와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의 콘서트를 이어가면서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saq9burMdQ
*표지사진 : 야니 콘서트 현장(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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