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프로젝트> ⑪ 멜리나 메르쿠리
그리스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정치활동가로 큰 사랑을 받은 전 문화부 장관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Remember me and Love me>가 지난 1월 18일부터 아테네 테크노폴리스 복합문화단지에서 열리고 있다. 이에 앞서 그리스 문화부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20년을 ‘멜리나 메르쿠리의 해’로 선포하고 국제워크숍과 상영회, 음악회, 연극, 전시 등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이번 전시도 그 행사의 일환이다.
사후 2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살아있는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에서 단순히 한 명의 유명 배우, 정치인이 아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빛나는 매력, 카리스마 넘치는 추진력, 사상과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행동한 실천가로서 강인하고 아름다운 ‘그리스의 마지막 여신’이자 ‘그리스 정신의 전형(The Epitome of the Hellenic Spirit)’으로 기억되고 있다.
“페드라! 페드라! ”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F장조가 볼륨업 되는 가운데 페드라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24세의 청년 알렉시스. 그가 운전하는 애스톤 마틴(Aston Martin)은 수니온 곶 해안도로를 미친 듯이 내달리다 앞서오는 트럭에 맞서 그대로 하얀절벽 아래로 부서져 내린다. 완벽한 파국.
클래식 영화팬이라면 한 번쯤 보거나 들어봤을 이 영화는 줄스 다신(Jules Dassin, 1911~2008) 감독의 1962년 작인 <페드라(Phaedra)>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에서 번역한 <죽어도 좋아>로 소개되었는데, 멜리나 메르쿠리가 남편의 전처 소생인 아들 알렉시스(앤소니 퍼킨스)와의 정사로 파멸하는 페드라 역을 맡았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희곡 「히폴리투스(Hippolytus)」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서로 방향이 다른 사랑의 화살을 쏘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몰락을 그렸는데, 멜리나 메르쿠리는 불륜이라는 도덕적 잣대보다 정염과 질투에 불타오르는 중년여인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영화를 더욱 비극적으로 완성시켰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페드라 콤플렉스를 동시에 담아낸 이 작품은 오랫동안 여러 다른 치정극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한편, <페드라>가 나오기 2년 전인 1960년, 쥴스 다신-멜라니 메르쿠리 커플의 첫 번째 작품인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는 로맨틱 코미디로, 피레우스 항구에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그리스 매춘부 일리야(Ilya)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에서처럼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다른 남자들과 만나 춤추며 놀던 여인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면서 달라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이 작품으로 1960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선 굵은 외모와 큰 키에서 우러나오는 강인함, 동시에 지적이고 우아한 아우라가 넘치는 매력의 멜리나 메르쿠리는 무슨 역이듯 자신만의 색깔로 당당하게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여배우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시의 그리스는 군부독재가 시작되고 각종 탄압이 가중됨으로써(1967~1974) 이에 대항하는 모든 문화예술은 금지당하거나 추방되는 시기였다.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고 활동력이 강한 멜리나 메르쿠리 또한 예외 대상이 아니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1920년 10월 18일 아테네의 유력한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스피로스 메르쿠리(Spyros Mercouris)는 아테네 시장이었고, 아버지 스타마티스 메르쿠리(Stamatis Mercouris) 또한 그리스민주좌파당(EDA) 대리인이자 장관이었다. 본명이 마리아 아말리아 메르쿠리(Maria Amalia Mercouri)로, 멜리나는 그녀의 두 이름 ‘Amalia–Maria’의 줄임말이다.
국립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부터 무대에 데뷔해, 유진 오닐의 <상복의 일렉트라>의 일렉트라,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 등 돋보이는 주연 자리를 꿰차며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그러다 1955년 35세의 늦은 나이로 과감하게 영화계로 들어가 영화 <스텔라(Stella)>를 시작으로, 훗날 남편이 된 줄스 다신과 함께 아카데미상 후보작인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1960년), <페드라(Phaedra)>(1962년), <토카피(Topkapi)>(1964년) 등을 만들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나갔다. 아테네에서 약 60편의 연극과 유명 감독의 영화 19편에 출연했다.
196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이던 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 군부의 쿠데타 소식을 접하고 그 즉시 독재 반대 투쟁에 들어간다. 군사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각종 인터뷰, 콘서트, 단식투쟁 및 여러 활동과 행사를 펼치는 멜리나 메르쿠리가 눈엣가시였던 군부는 그녀의 국적을 박탈하고 재산을 환수해버릴 뿐 아니라 테러 공격과 제노바에서의 암살 시도까지 범한다. 고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며 그리스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메르쿠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정치가 필요하다’란 명언을 남기기도.
1974년 마침내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그리스로 돌아간 메르쿠리는 배우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본격적인 정치활동과 여성운동에 참여한다. 1977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고, 1981년에는 그리스 최초의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8년 동안 최장수 문화부 장관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1993년과 1994년에도 다시 문화부 장관으로 활동했지만 1994년 3월 6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모든 활동을 멈추게 된다.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부심입니다. 우리의 희생입니다. 우리의 탁월함에 대한 고귀한 상징입니다. 그것들은 민주주의 철학에 대한 찬사입니다. 우리의 열망이자 이름입니다. 우리 그리스의 본질입니다.”
문화부장관이 된 후 메르쿠리 장관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영국이 약탈해 대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 반환을 위한 이른바 ‘엘긴 마블스 반환 운동’이었다.
이스탄불의 첫 영국 대사였던 앨긴 경(Lord Elgin, 1766~1841)은 터키 지배하에 놓인 1800년대 그리스의 혼돈을 틈타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대리석 조각을 떼 배로 33회에 걸쳐 무려 27년 동안 영국으로 운반한 것이다. 현재 대영박물관 파르테논 갤러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유물들은 약탈 문화재의 반환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수백만 개의 문화재가 약탈되어 다른 나라 박물관에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현실이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의 건물 조각들을 무자비하게 떼 내어 수레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른 이야기란 것.
1982년 메르쿠리 장관이 이 유물들의 원산지 국가 반환 또는 불법 사용시 그리스 반환 요청을 공식 제기하면서 유네스코의 권고가 내려졌지만 영국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
“죽기 전에 아테네에서 대리석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 돌아온다면 그때 나는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대리석 반환 공식 요청 후 10년 뒤 메르쿠리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 <페드라>에서 페드라가 의붓아들 알렉시스를 처음 만나는 장소도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대리석 앞이다.)
문화부 장관으로서 메르쿠리의 업적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1983년 유럽연합 문화부 장관회의를 처음으로 주선하고, “문화, 예술 및 창조는 상업, 경제 및 기술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고 설파하면서 1985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자크 랑(Jacques Lang)과 함께 ‘유럽 문화 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 기구를 창설했다. 물론 그 첫 도시는 아테네였다.
무엇보다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반환을 대비해 뉴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건립 모금을 개시했다. 또 아크로폴리스까지 오르는 차량을 금지하고 걷는 길을 만들기도 하고, 그리스 문화유산에 대한 청소년 교육, 세계 순회 그리스예술 전시회 개최, 옛 건물 복원사업, 아테네 음악당 완공, 20세기 그리스에 지어진 가장 큰 박물관인 테살로니키 비잔틴 박물관 프로젝트 후원, 문학상 제정, 시립 지역 극장 및 음악원 설립, 그리스 영화 홍보, 또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게임 100주년 기념 1996년 그리스 올림픽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1993년 두 번째 문화부장관 역임시에는 에게 해 제도의 문명과 환경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에게 해 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즐거움을 통한 교육’이라는 슬로건으로 학생 문화예술교육에도 힘썼다.
유네스코에서는 메르쿠리 장관의 뜻을 세겨 1995년 ‘그리스 멜리나 메르쿠리 문화경관 보호 및 관리 부문 국제상(UNESCO-Greece Melina Mercouri International Prize for the Safeguarding and Management of Cultural Landscapes)'을 제정했다.
(https://whc.unesco.org/en/culturallandscapesprize)
세계 유산의 범주인 세계의 문화 경관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그리스 정부가 아낌없이 지원하며 2년마다 수상자에게 30,000달러의 상금이 수여된다. 2021년에는 슬로베니아 포드세레다의 코잔스코공원 공공연구소가 수상했다.
멜리나 메르쿠리는 1994년 3월 6일 뉴욕 메모리얼 병원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1994년 3월 10일 국가장례로 치러졌다.
멜리나 메르쿠리의 그리스에 대한 사랑은 그녀에게 그대로 돌아가 전례 없이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배우이자 정치가로 남아 있다.
마지막 그리스의 여신, 테크노폴리스에서 되살아나다
2022년 1월 18일부터 3월 1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그리스 문화체육부와 멜리나 메르쿠리 재단이 협력하고 니콜라스 속스(Nikolaos Socks)가 큐레이팅하여 멜리나 메르쿠리에게 헌정하는 전시다.
<Remember and love me>라는 제목으로 영화, 연극 및 정치 분야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3개의 섹션을 통해 메르쿠리의 삶과 작업을 소개한다.
특히 연극과 영화에서 입은 13벌의 의상, 영화 포스터 25개를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엘리자베스 여왕, 인디라 간디, 카트린 드뇌브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한 사진 37장, 직접 쓴 메모가 있는 원본 스크립트, 마지막 뉴욕으로 떠날 때의 물건 등 사적이고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멜리나 메르쿠리 재단
멜리나 메르쿠리가 문화부 장관이었을 때 계획하고 실행한 정책의 기본 아이디어를 채택하여 그리스 문화 진흥과 보급에 기여하기 위해 남편 줄 다신 감독이 세운 재단.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의 반환을 위한 모든 행동을 진행하고 있고,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건립 활동 추진, 각종 그리스 문명의 가치와 이상을 증진하기 위한 전시회, 강의, 회의, 출판물 및 교육 프로그램 운영하고 있다. 또한 역사, 문학, 고고학 또는 인류학 대학원 연구를 위해 대학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전 시즌에 두각을 나타낸 젊은 여성 배우에게 매년 최우수 연기상을 수여하고 있다.
https://melinamercourifoundation.com/en/
멜리나 메르쿠리 문화센터
1886년에 지어진 옛 모자공장을 리모델링하여 1988년에 멜리나 메르쿠리에 헌정된 문화공간. 1층에는 20세기 초반 아테네 거리를 생생하게 재현한 전시가 있다.
카페 멜리나
멜리나 메르쿠리 사진이 가득한 카페와 비스트로로 되어 있다.
멜리나 메르쿠리 기념비 흉상
아말리아스 거리(Amalias avenue)에 있는 멜리나 메르쿠리 흉상
표지사진 :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 멜리나 메르쿠리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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