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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Han Jan 08. 2023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We are all Greeks

<그리스 프로젝트> ⑫ 조지 고든 바이런


19세기 인기 아이돌이자 셀럽에서

그리스 영웅이 되기까지        


잘생긴 얼굴, 타고난 능력, 모종의 결핍, 오만함과 기행, 이상주의자, 짧은 생애…, 천재 예술가나 화려한 셀럽을 만드는 몇 가지 정형이 있다면, 영국 시인 바이런만큼 여기에 적확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미남+천재+난봉꾼+요절’의 전설은 아마 그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더라(I a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는 말로 잘 알려진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비록 남작의 작위를 지녔지만 희대의 난봉꾼이자 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더 회자되는 인물이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후기 낭만파 대표 시인으로 셸리(Shelley), 키츠(Keats)와 함께 바이런(Byron)이 있다. 낭만파란 ‘저항’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이전까지의 세계 질서라 할 수 있는 제도와 관습에 저항, 규범과 규칙의 굴레를 벗어나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거나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사조라 할 수 있다. 젊고 자유분방한 이들 시인 트리오의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행동과 표현들은 유럽 사교계와 지성계에 자극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당대의 셀럽으로 주목받게 했다. 세 명 모두 각각 29세, 26세, 36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짧은 삶에 비해 강렬한 아우라와 긴 파장을 남긴 것이다.     

  

이 중 특히 바이런은 살아 생전 ‘미쳤고, 나쁘고 위험한 존재’로 지탄받았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의 일인자였다. 근친상간, 불륜, 양성애 등을 오가는 연애 스캔들과 전 재산을 탕진하고 작위를 팔아야 할 정도의 소비와 도박, 한쪽 다리 장애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스포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경쟁심, 우울증과 궁핍 등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생활 등은 바이런에 대한 사람들의 관용에 자주 한계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이상주의적 행동, 세련된 문학과 예술, 자유사상, 정치 참여 등에서부터 패션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것들은 서구의 정신과 마음을 사로잡아 19세기를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 주앙의 전설에 기초하여 쓴 풍자 서사시(Epic Satire) 《돈 주앙(Don Juan)》에서 바이런은 “모든 권위를 조롱하고 관습과 믿음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자가 돈 주앙이다”이라며 “나는 반대를 위해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지칠 줄 모르는 자유 옹호자로서 당대 영국의 제도와 화합하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망명을 떠난 인물이다. 무모한 소영웅주의자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자기 분석을 뒷받침한 그의 뛰어난 시들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오랫동안 바이런이라는 명성을 유지하게 했다.      

1810년 그리스 여행중 바이런은 포세이돈 신전(네 번째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 그리스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의 부적이다. ⒸWikimedia, greece-is.com


“그리스의 공기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아테네 시 제우스 신전 근처에 있는 자페이온(Zappeion) 전시관에는 아테네 여신의 품에 안긴 채 왕관을 쓴 바이런의 동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 조각가 앙리 미셸 차푸와 알렉상드르 팔귀에르에 의해 만들어져 1896년 올림픽에 맞춰 세워졌다. 이 동상의 공식명칭은 ‘바이런에게 감사를 표함(Η Ελλάς (ευγνωμονούσα)  τον Βύρωνα)’이다.       


그리스 서부 미쏠롱기(Missolonghi)의 ‘영웅의 정원 Garden of Heroes’에도 1881년 그리스 조각가 게오르기오스 비탈리스가 조각한 바이런의 동상이 맨 먼저 우뚝 서 있다. 실제로 바이런의 심장은 이 동상 아래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보내졌다.) 미쏠롱기는 바이런이 숨을 거둔 곳으로 그가 살던 곳엔 현재 박물관이 세워졌다.      


‘바이런’(Byron)의 그리스어 형태인 ‘비론’(Βύρων (Vyron))은 그리스에서 남자 이름으로 인기가 있고, 아테네 교외는 바이런 서거 100주년 기념으로 그의 이름을 따 비로나스(Vyronas, 바이런 거리)로 불린다. (인접한 거리에 동료 시인 셸리(Shelly)의 이름을 딴 셸리 스트리트(Shelly Street)도 있다.) 그리스 정부는 2008년부터 바이런의 기일인 4월 19일을 ‘바이런의 날’로 정해 그를 추모하고 있고, 7월에는 ‘바이런 축제’도 열고 있다.      


바이런이 그리스에서 이토록 큰 추앙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난봉꾼은 어찌하다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일까?


아테네 여신의 품속에서 왕관을 받고 있는 아테네의 바이런 동상(왼), 그리스 서부 미쏠롱기 영웅의 정원의 바이런의 동상ⒸWikimedia


그리스 독립전쟁에 돈, 시간, 에너지, 그리고 마침내 삶 전체를 바쳤다   

   

바이런이 그리스를 처음 찾은 것은 1809년 ‘그랜드투어’의 일환이었다. 그랜드투어는 당시 귀족 자제들에게 필수 교육과정인 유럽대륙 여행으로, 바이런은 2년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 등지를 떠다닌다. 그리스 문화를 열렬히 사랑하던 바이런은 그리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일드 헤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 1, 2부를 발간한다. 지중해와 그리스에서의 여행 일지를 그린 이 연작시는 발간되자마자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어 당시의 밀리언셀러가 된다(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더라는 말도 이때 나온 것이다). 바이런에 대한 사람들의 선망은 그리스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 이때부터 유럽인들에게 바이런의 시집을 들고 그리스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종의 엘리트 필수 코스가 되었다고 한다.     

 

바이런이 두 번째 그리스를 찾은 것은 1823년. 친구 시인인 셸리의 급진적 이상주의에 큰 영향을 받던 차에 그리스가 독립전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마지막 위대한 모험을 떠나게 된다. 400년이 넘도록 오스만 제국(터키)의 점령으로 핍박받던 그리스에서의 독립전쟁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설파하고 큰 지원금을 따낸 바이런은 이 돈으로 함선을 사고 그리스 전쟁의 군자금을 댄다. 급기야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그리스 독립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그리스 국민에게 큰 용기를 주게 된다. 마치 트로이전쟁에서 바다 건너 달려온 포세이돈처럼 절망에 빠진 그리스인들에게 바이런의 존재는 구원자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도 바이런에게 사단을 하나 맡기며 그의 참전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바이런은 그의 열의와는 달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열병과 폐렴에 걸려 36세의 나이로 그만 죽고 만다. 1824년 4월 19일 그리스 서부 미쏠롱기에서의 일이다.     


바이런은 시인으로서 그리스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노래했고, 그리스 독립전쟁에는 돈, 시간, 에너지,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삶 전체를 바쳤다. 바이런의 마지막 시로 알려진 <오늘 나는 36세가 되었다>(On This Day I Complete My Thirty-Sixth Year)는 1824년 1월 22일 그의 생일날, 미쏠롱기에 도착한 것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으로, 마치 예감이라도 한 듯이 “청춘을 외치면서 왜 생명을 오래 지니려는가? 여기는 영예로운 죽음을 이룰 수 있는 나라(…)”라고 적고 있다.      


귀족이었던 바이런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으나 영국에서의 행실 등을 문제삼아 거부당했고, 바이런 집안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9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바이런의 시가 조각된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영국 낭만파 대표 시인의 명예를 그나마 회복시켜 주었다.  


미쏠롱기에서 바이런을 환영하는 그리스군대(왼)과 병상에서의 바이런(오른) ⒸWikimedia



세계 최초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아버지? 


바이런은 스캔들만큼 수많은 사생아를 남기기도 했는데, 법적 자식으로는 유일하게 딸 에이다 바이런(Ada Byron, 1815~1852)이 있다. 훗날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으로 불린 에이다는 오늘날 ‘세계 최초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평가받고 있는 수학자이다. 시인 남편 바이런의 감성이 지긋지긋했던 어머니 앤 이사벨라는 딸만큼은 다르게 키우고 싶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 대신 수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초기 컴퓨터과학에 알고리즘 개념을 도입, 오늘날 프로그래밍의 시작을 알렸다는 공로로 미국 국방부는 에이다의 생일에 맞춰 1980년 12월 10일 ‘에이다’라는 이름의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명명했고, 국방부 군사 규격에 붙은 숫자 1815는 에이다가 태어난 해를 뜻한다고 한다. 또한 영국컴퓨터협회(British Computer Society)는 매년 그의 이름으로 메달을 수여하고 있고, 탄생 197주년인 2012년에 구글은 에이다를 모델로 한 구글 두들을 만들어 헌정하기도 했다.      


이쯤이면 바이런 부녀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정신적 자유의 이름으로, 또 과학기술의 이름으로.


2012년에 구글은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알려진 바이런의 딸 에이다의 탄생 197주년을 기념하여 구글 두들을 만들었다.




[같이 보면 좋은 바이런 관련 영화들]


< Mary Shelley 2017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


세계 최초 SF소설로 알려진 <프랑켄슈타인> 탄생 200주년 기념 영화.

문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열여덟 소녀 메리는 아버지의 제자인 낭만파 시인 셸리와 운명적 사랑에 빠지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도피를 떠난 두 사람. 어느 비 내리는 날 시인 바이런의 집에 초대된 그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만들어볼 것을 제안받고 메리는 그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괴물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다.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여성감독 하이파 알 만수르(Haifaa Al Mansour), 메리 셸리 역에 엘르 패닝(Elle Fanning), 퍼시 셸리 역에 더글라스 부스(Douglas Booth), 바이런 역에 톰 스터리지(Tom Sturridge). 2018년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소개되었다. (Daum 영화 참고)     


  https://tv.kakao.com/v/393796146


< 에이다 러블레이스 Conceiving Ada, 1997 >


세계 최초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시인 바이런 경의 딸이자 ‘해석기관’이라 불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알려져 있다. 매혹적인 공상과학적 요소와 양식화된 외양이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으로,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에이다 역을 맡았다.      

감독 린 허쉬만-리슨(Lynn Hershman-Leeson), 2017년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Daum 영화 참고)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에이다 역을 맡은 영화 에이다 러블레이스  ⒸDaum 영화

  

< 로윙 윈드 Rowing with the wind 1988 >


휴 그랜트가 바이런 역을, 엘리자베스 헐리가 바이런의 애인인 클레어 역을 맡았다. 극단적 낭만파 시인이었던 바이런과 셸리가 메리 자매(메리, 클레어)와 함께 스위스로 도피했을 무렵부터 이후에 벌어지는 비극들을 담고 있다. 메리는 바이런의 충고에 힘입어 공포소설(플랑켄슈타인)을 쓰기 시작하고 주변인들은 자살하거나 사고로 죽고, 바이런은 자유를 위해 그리스 독립전쟁터로 나간다.      

감독 곤잘로 수아레즈(Gonzalo Suarez), 바이런 역에  휴 그랜트(Hugh Grant), 메리 셸리 역에 리지 맥키너니(Lizzy McInnerny),  퍼시 셸리 역에 발렌타인 펠카(Valentine Pelka), 클레르 클레르몽 역에 엘리자베스 헐리(Elizabeth Hurley).    

휴 그랜트가 바이런 역을, 엘리자베스 헐리가 바이런의 애인인 클레어 역을 맡은 영화 로윙 윈드(1988)


< 트립 투 이탈리아 The Trip to Italy, 2014 >


마이클 윈터바텀(Michael Winterbottom) 감독의 <더 트립> 시리즈 중 <트립 투 이탈리아>(2014)는 셸리와 바이런의 이탈리아에서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는 로드무비다. 영국의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스티브 쿠건(Steve Coogan)과 롭 브라이든(Rob Brydon)의 속사포 같은 대화 너머 스며 있는 셸리와 바이런에 대한 이야기들은 먹거리 넘치고 볼거리 넘치는 이탈리아의 매력을 넘어서는 지적인 재미를 준다.   

  https://tv.kakao.com/v/68692486


*“We are all Greeks”는 바이런이 한 말로도 알려졌으나, 원래 셸리가 한 말로, 당시 많은 유럽의 엘리트들이 유럽문명의 보고인 그리스에 동조해 그리스 독립전쟁 참가를 독려하며 나온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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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log.naver.com/azul24/22297848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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