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프로젝트> ② 그리스의 끝, 마니
두 번째 독서에서는, 첫 번째와 달리 밑줄 치는 부분이 많아졌다. 나는 웬만해선 책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하기에 정말 아름다운 문장에서만 살포시 밑줄을 긋는 편인데, 이번에는 정보가 될만한 부분이나, 나중에 또 필요할 듯한 부분에는 겁도 없이 좍좍 줄을 긋거나 덕지덕지 포스트잇을 붙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리스어 알파벳을 어느 정도 익힌 상황인지라 예전에 멋도 모르고 보았던 부분이 이제서야 조금씩 이해가 되는 기특한 순간들도 있었다. 두 번째 읽는 것이지만 마치 처음 읽는 듯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훨씬 더 재밌게 읽혔다. 아마 기회가 된다면 세 번째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또 그리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세 번째의 눈으로….
‘펠로폰네소스 남부 여행기’라는 부제가 붙은 <그리스의 끝, 마니>(Mani: Travels in the Southern Peloponnese by Patrick Leigh Fermor)는 영국의 방랑작가로 알려진 패트릭 리 퍼머가 그리스 마니 지역을 여행하고 쓴 책으로 1958년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마니’라 불리는 지역은 그리스의 서쪽 지중해를 향해 삼지창 모양으로 뻗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가운데 지역이다. 위로는 거친 바위산인 타이게토스 산맥으로 막혔고, 아래로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가르는 마타판 곶이 있는데, 고대에는 타이나로스라 불리며 뱃사공 카론이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지옥의 문인 하데스의 입구로 여겨진 곳이라 한다. 그리스의 최남단이자 앞뒤로 꽉 막혀 있어 그리스 현지인들조차 출입이 어려웠다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땅, 마니!
그리스인들에게 마니라는 지역은 그리스의 주류 역사에서 한참 벗어난 곳으로, 그나마 알려진 것은 씨족 간의 혈수(血讐-죽기를 각오하고 갚으려는 깊은 원수)라든지 독특한 만가(挽歌-상엿소리)와 장례문화,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마니의 지도자(페트로베이 마브로미칼리스), 400년 간 그리스를 지배한 터키인(투르크족)들이 끝내 정복하지 못한 독립지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니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일부가 고대 스파르타인들로부터, 또는 비잔티움 사람들로부터 내려왔다고 믿으며 그 자부심과 독립심이 하늘을 찌른다. 마니에는 거지가 없고 도둑도 없고 문을 잠그는 일도 없다고 한다. 외지인들을 ‘블라크인’이라 부르며 무시하는데, 블라크인이란 평원에 사는 사람, 즉 비천한 속물들의 후손들이란 뜻이라고.
검은 피부에 뻣뻣한 콧수염과 움푹 들어간 눈,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한 마니 사람들의 얼굴은 어쩌면 수세기에 걸친 지독한 가난과 슬픔으로 그늘진 삶이 고스란히 외모로 유전된 것인지도 모른다. 음울한 외모만큼 문화면에서도 특이점을 지니는데, 그리스 전역이 리라나 만돌린 반주에 맞춰 다채로운 운율의 노래와 전통춤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마니 지역에서는 춤이 거의 없다고 한다. 대신 시의 운율을 지닌 만가(挽歌, 상엿소리), 미롤로이아(운명의 노래)가 마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시가라고 한다.
마니에서 죽음과 장례식은 여자들이 주도하며 역량을 발휘하는 몇 안 되는 행사 중의 하나로, 애도 역시 여자들의 몫이다. 밤을 새워 울부짖다시피 곡을 하고 주기적으로 발작적인 비명에 가까운 아우성을 내지르며 자기 뺨을 할퀴어 상처를 내는 과부나 엄마들의 액션은 북서 유럽의 점잖은 장례식만 보아온 사람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광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니의 만가에서만은 다듬어지지 않은 울부짖음이 아니라 완벽한 시이자 엄격하게 16음절 운율을 따르는 긴 장례찬송이라는 것. 즉흥시와 연기 천재들의 이 만가 퍼포먼스는 어쩌면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의 전통을 계승한 건 아닐까, 라고 저자는 생각하기도.
저자인 패트릭 리 퍼머(Patrick Leigh Fermor, 1915~2011)는 ‘20세기 최고의 여행작가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진 사람이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터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이르는 도보여행을 기록한 <선물 받은 시간>과 <숲과 강 사이로>는 큰 호응을 얻은 바 있고, 또 2차대전 중 큰 공적을 세워 그의 삶이 영화화되기도 한 인물인데, 말년에는 마니 지역의 올리브숲에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고 한다.
애초에 패트릭 리 퍼머는 그리스 본토와 여러 섬을 느긋하게 여행다니며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여행기를 쓰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곳이 흥미진진하고 어디에나 이야깃거리가 깃들어 있으며, 어느 바위건 개울이건 전투나 신화, 기적, 이름 모를 농부의 이야기, 미신이 얽히지 않은 곳이 없고, 여행자가 한걸음 내걸을 때마다 기이한 이야기와 사건이 무성하게 펼쳐지는’ 그리스를 겉핥기로 다루기가 싫어졌다. 어느 한 곳을 정해 ‘깊숙이 침투하고’ 싶어졌다. 환경과 역사의 오랜 관계가 훼손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유물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에 관찰하고 기록해두고 싶어졌다.
그 한 곳이 ‘여름에는 돌멩이만 있는 무지 더운 동네이자, 겨울엔 바람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곳’인 마니이고, 그곳에 대한 기록이 이 책 <그리스의 끝, 마니>이다. 여행기라는 큰 카테고리로 묶이지만,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역사, 신화, 민속, 종교, 예술, 건축, 언어, 사회, 정치, 인물 등 잡히기만 하면 집요하리만치 파고 들어가 읽는 이들을 길 잃게 만들고,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다시 스스로 길을 찾아 나오게 만든다.
물론 쉽지는 않다. 특히 동아시아의 우리들에게 그리스의 신화와 동남유럽의 역사는 피부로 와닿기보단 겉돌기 일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다양한 비유 속에 펼쳐지는 방대한 기록은, 결국 거대한 유기체로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의 지평을 열어주기에 충분하다.
마니에 매료된 패트릭 리 퍼머는 여행기로 끝내지 않고 20년 동안 완벽한 장소를 찾다 카르다밀리 지역에 직접 아름다운 석조 건물을 짓고 아내 조안과 함께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브루스 채트원을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찾아와 여름을 함께 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후엔 그의 유언에 따라 베나키 박물관(Benaki Museum)이 이끄는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리아 호텔(Aria Hotel)과 협력하여 현재 호텔과 작가 작업실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의 촬영도 바로 이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하니, 이래저래 마니의 특별한 문화공간이 된 셈이다. 물론 나의 그리스 여행의 목적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1) 2015년 인터파크 블로그에 올린 <그리스의 끝, 마니> 첫 번째 북리뷰
http://book.interpark.com/blog/azul1/4119294
2) 표지사진 및 패트릭&조앤 리 파머 하우스 사진 출처 :
- THE PATRICK & JOAN LEIGH FERMOR HOUSE STUDIO RESKOS (CopyRight)
3) 패트릭 리 파머 사진 출처 :
- Patrick Leigh Fermor in 1945.Credit...Evening Standard/Getty Images
- Patrick Leigh Fermor at Ithaca (John Murray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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