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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Han Jun 27. 2021

자정이 오기 전에…

<그리스 프로젝트> ③ 비포 미드나잇


사랑할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자정이 오기 전에 우리 화해하자,

그리고 계속 사랑하며 살아가자.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의 ‘비포 3부작’(The Before Trilogy)은 각각 비엔나, 파리, 그리스라는 유럽의 아름다운 세 곳을 배경으로 사랑의 과정을 시간에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는 영화다.

해 뜨기 전에, 해지기 전에, 그리고 자정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랑의 역사는 이루어진다(그러므로 더 이상의 연작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 연작의 마지막 영화가 된 <비포 미드나잇>은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갈팡질팡하지만 끝내 성숙해져 가는 두 사람의 사랑의 행로에 완결판이 되어준다.




1995년 비엔나로 가는 유럽횡단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 청년 제시(에단 호크)와 프랑스 소녀 셀린(줄리 델피)의 하룻밤 이야기인 <비포 선라이즈>는 당시 유럽 배낭여행과 풋사랑의 기억을 한껏 실어 세계 젊은이들을 들뜨게 했다. 다시 9년 뒤인 2004년, 자신들의 에피소드를 소설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가 파리의 서점(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을 방문하면서 셀린과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남아 있는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면서 <비포 선셋>으로 이어진다.     


<비포 미드나잇>은 다시 9년이 흐른 2013년, 전처와 이혼하고 마침내 셀린과 결혼하여 쌍둥이딸을 둔 제시가 작가협회 초청으로 그리스의 한 레지던스에서 여름휴가를 맞으면서 시작된다. 일과 양육과 생활이라는 지리멸렬함의 한가운데 있는 이들의 대화에는 더 이상 비엔나에서의 설렘과 파리에서의 낭만은 없다. 끝없이 상대편을 떠보고 확인하고 약 올리고 빈정대며 누가 더 힘든지 비교하기에 바쁘다. 마침 친구가 호텔 티켓을 보내줘 둘만의 오붓한 하룻밤을 보내려 하지만 와인병을 채 따기도 전에 말다툼은 극에 달하고 관계는 끝장이 나버린다.      


밤의 바닷가,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셀린에게 제시가 다가가 그 옛날 기차역에서 만났던 달콤하고 로맨틱한 남자가 바로 자신이라며,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자고, 완벽하진 않지만 이게 진짜 삶이라며 화해를 제안한다….        


시선이 관계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아래위로 쳐다보고, <비포 선셋>에서는 마주보고 있으며,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햇빛이나 일몰처럼 우린 나타났다가 사라져. 우리는 몇몇 사람에겐 무척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지.”




에릭 로메르와 리차드 링클레이터,

<녹색광선><비포 미드나잇>     


“Still there, still there, gone.”

<비포 미드나잇>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제시와 셀린이 카다밀리(Kardamyli) 해변 부둣가에 앉아 아드리아해로 내려가는 해를 끝까지 지켜보는 석양 씬이다.

서서히 사라지는 태양을 함께 지켜보는 이 장면은 또 다른 이미지를 오버랩되어 떠오르게 하는데, 바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에릭 로메르(Éric Rohmer, 1920~2010)의 영화 <녹색광선>(Le Rayon Vert, 1986)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녹색광선>은 쥘 베른의 소설 <녹색광선>을 하이퍼텍스트로 한 영화로, “녹색 광선을 볼 땐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란 말을 모티브로 한다. 소심한 파리의 아가씨 델핀이 친구들과 그리스로 여름휴가를 가려 하지만 이리저리 약속이 깨지고 침울해 하다 혼자 친구의 별장인 비아리 해변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 생장드뤼로 가 함께 바다 너머 석양의 끝에서 ‘녹색광선’을 목격한다는 이야기다.      


‘말만 많고 사건이 없는 프랑스 영화풍’을 ‘로메르 장르’라 부른다지만, 일상을 철학으로 이끌고 대화의 즐거움을 안겨준 시네아스트로서 에릭 로메르가 영화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그의 사후 3년 뒤인 2013년에는 ‘로메르 오마주’라 할 만한 영화들이 제법 나왔는데, 노아 바움(Noah Baumbach)이 <프란시스 하>(Frances Ha)에서 독신여성의 캐릭터와 프랑스 방문 씬을 썼고,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미드나잇>은 <녹색광선>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 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술과 대화의 긴 이야기들이 많은 장면을 차지하고 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광선>(1986), “녹색 광선을 볼 땐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
카다밀리(Kardamyli) 해변 부둣가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제시와 셀린, <비포 미드나잇>(2013)




시간과 함께 만들어진 인생 영화     


‘비포 3부작’은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주인공인 에단 호크, 줄리 델피가 18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 나이들어 가면서 만든 영화다. 풋풋한 사랑의 시작에서 지지고 볶는 현실 가족이 되어가는 스토리와 더불어 청년에서 중년으로 변해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시리즈를 더욱 공감력 있게 만들었다.

세상 청초하던 소녀 셀린이 축 처진 젖가슴과 굵어진 허릿살을 숨기지 못하는 히스테릭한 중년여성이 되고, 미소가 매력적이던 청년 제시는가 어딘가 권태롭고 어정쩡한 아저씨가 되어버린 걸 내내 지켜보는 것은 솔직히 마음 아픈 일이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상황이기에 그 리얼리티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게 관객들의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이런 실험은 <비포> 시리즈만이 아니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보이후드>(Boyhood) 또한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을 기용하여 만든 영화로 유명하다. 주인공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가 여섯 살 때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이혼 부모(여기서 아버지 메이슨 시니어는 에단 호크가 맡았다)와 가족, 주변의 변화 등을 따라가며 인생의 격동과 감동을 담담하게 담아낸 성장영화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다.

어쩌면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이런 일대기 따라잡기식 영화 또한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같이 지켜보기 위해서는 되도록 오래 살아야 할 것 같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보이후드>(Boyhood) 또한 12년 동안 같은 배우들을 기용하여 만든 영화로 유명하다.



패트릭 앤 조앤 리 퍼머 하우스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비포 미드나잇>의 주 로케이션 장소는 마니 반도의 카다밀리 해변에 있는 ‘패트릭 앤 조앤 리 퍼머  하우스 Patrick & Joan Leigh Fermor House’다. (나의 <그리스 프로젝트> 1, 2에서 계속 소개한)

잘 알려졌다시피 전설의 여행작가 패트릭 리 퍼머가 여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다 그의 집을 작가들의 작업실로 쓰기를 유언으로 남겼고, 2019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어 작가 레지던스 겸 호텔로 운영중인 곳이다.

영화 속에서 제시는 작가협회의 초청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어 여름휴가를 가족과 보낸다.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바다가 보이는 돌로 만든 테라스에 누워 자신의 책과 글, 아이디어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식당에서 시니어 커플과 중년 커플, 젊은 커플 등과 함께 와인을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로메르식의 긴 대화를 나눈다.

마당엔 모자이크와 자갈이 깔리고 석조건물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이 건물은 주변으로 눈부신 해변과 사이프러스, 올리브나무가 둘러싸고 있으며 집 안에는 패트릭 리 퍼머가 남긴 6,000권의 책들이 도서관을 이루어 작가나 시인, 예술가, 연구원들의 레지던스로 사용하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춘다. 일반인을 위한 가이드 투어도 있으며, 이메일(leighfermorhouse@benaki.gr)로 사전 예약하면 된다. 입장료는 10유로.


https://www.benaki.org/index.php?option=com_buildings&view=building&id=45&Itemid=1085&lang=e




<비포 미드나잇>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 장소들 마니의 촬영지들     


영화 속에 배경이 되는 곳은 모두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마니 지역으로,'패트릭 리 퍼머 하우스' 이외에 다양한 곳들이 소개되어 있다.    

   

카다밀리(Kardamyli), 제시와 셀린의 레스토랑 석양 장면

해변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커플이 석양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는 장면의 배경이 된 곳. 실제 레스토랑은 없지만, 이 부둣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황금 해변과 산길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

Platsa, 비잔틴 예배당이 있는 작은 마을

제시와 셀린이 방문한 마을. 프레스코화가 있는 14세기 비잔틴 성당이 있는 곳으로 수호 성인인 Saint Odilia를 모시고 있다.

필로스(Pylos). 제시와 셀린이 석양을 보며 서로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얘기하는 곳

펠로폰네소스의 남서쪽 해안을 따라 자리 잡은 아름다운 마을 필로스. 현재는 번화한 해안가와 가게, 식당 등으로 활기찬 곳이 되었다.

메토니 성(Methoni Castle), 제시와 셀린이 탐험하는 유적지

필로스 근처의 13세기 중세 요새. 인상적인 14개의 아치형 돌다리가 있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라고 한다.

고대 메시니의 유적, 쌍둥이 딸들이 보고싶어 했지만 그냥 지나치는 폐허 유적지

칼라마타(Kalamata)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메시니의 폐허 유적지. 아름답게 보존된 고대극장, 우뚝 솟은 아르카디아 문,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경기장 중 하나가 있는 광대한 고대 도시가 남긴 유산을 보여준다.

웨스틴 리조트 코스타 나바 리노, 제시와 셀린가 묵은 호텔

영화에서 대판 싸움질하지만 다시 돌아와 로맨틱한 밤을 보낼 것으로 추정되는 호텔. 출연진과 제작진이 촬영 중에 머물렀던 곳이고, 현재도 운영 중이다. 촬영된 방은 영화팬들을 위한 'Before Midnight' 스위트룸으로 운영중이라고.

칼라마타 국제 공항, 제시가 아들과 이별하는 작은 공항

남부 펠로폰네소스로 연결하는 가장 편리한 교통 허브인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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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azul24/222411844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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