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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Han Jul 10. 2021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

<그리스 프로젝트> ④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

먼 북소리의 그리스,  노르웨이 숲은 이곳에서 탄생했다


마흔이란 나이는, 더 이상 ‘젊음’이란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생의 중요한 기준 혹은 (중년으로 넘어가는) 표시가 된다. 어떠한 마흔에게도 ‘젊다’는 표현을 함부로 붙이지 않는다. 간혹 ‘요절’이란 단어와 함께 쓸 때만이 ‘아까운’ 혹은 ‘젊은’의 의미로 대할 뿐.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마흔을 맞이하고, 마흔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의 방법은 각자에 달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여기가 아닌, 저곳으로의 이동 혹은 비상을 통해 지금까지의 나를 떠나고 싶어 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새로운 ‘마흔’으로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마흔이 되기 전에는 일단 떠나는 게 좋다. 그럴 수만 있다면…. 


괴테는 마흔을 앞두고 이탈리아로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기행』을 썼다. 이 여행은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 마흔이 되기 전에 위대한 것들에 전력을 기울여 스스로를 교육하고자 했던 이유가 크다. 

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한 후 괴테는 이렇게 썼다. 

“이제 나는 여기에 있고, 평안하다. 그리고 내 삶 전체에 대해 안심하고 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는 마흔을 3년 앞둔 1986년에 부인과 함께 3년 동안의 남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에 남겨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싫든 좋든 다시 돌이킬 수 없다. … 마흔 살이란 분수령을 넘음으로써, 다시 말해서 한 단계 더 나이를 먹음으로써, 그 이전까지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 멋진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생각했다. 새로운 것을 얻는 대신에 그때까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앞으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먼 북소리』 14~15면


이 때가 아니면 절대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설을 마흔이 되기 전에 써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이 아닌, 일상이 아닌, 먼 곳으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그런 생각은 마치 주술처럼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귀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먼 북소리』 17면)      


2004년에 두 번째 번역으로 나온 <먼 북소리>(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가 머문 그리스의 지역들


관광 성수기를 벗어난진짜 그리스에서의 삶     


먼 북소리를 따라 떠난 하루키 부부는 로마에서의 정신없는 10일을 보낸 후 아테네로 옮겨가면서 본격적인 그리스 생활을 시작한다. 10월 중순 무렵 ‘아름다운 해변, 자동차가 없는 섬, 조용한 나날’의 아주 이상적인 생활을 상상하며 첫 번째 주거지인 스펫체스(Spetses)’ 에 도착한다. 그러나 모든 시스템이 관광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섬은 성수기가 지난 ‘비수기의 애달프고 싸늘한 분위기’에 메마른 현실만 드러낸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서는 눈 녹는 소리와 함께 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섬의 가을은 야외 타베르나의 의자 접는 소리에서 시작된다.(68면, 스펫체스 섬)     


여름 피서용 별장 같은 허름한 아파트에 살면서 저녁이면 마을에 하나 남은 극장에서 고양이 손님과 함께 브루스 리의 영화를 보고, 밤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스펫체스 섬에서의 생활. 그러나 이 삶은 늦가을의 예상치 못한 폭풍우로 막을 내리고, 다시 미코노스 섬으로 자리를 옮기게 해준다.   

   

에게해 한가운데 있는 ‘미코노스(Mykonos)’ 에서의 한달 반은 하루키 인생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시기가 되는데, 그것은 이 섬에 와서야 비로소 ‘학수고대하던 소설 쓰기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바로 『노르웨이 숲』이었다. 오늘의 하루키로 성장시킨 발판과도 같은 역할을 한 소설이 이 책이다.  

     

그때는 소설이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내 몸은 말을 찾아서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거기까지 내 몸을 ‘끌고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편소설은 그 정도로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마라톤처럼 거기에 다다르기까지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면 막상 버텨야 할 때 숨이 차서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142면, 미코노스)     


하루키는 2015년에 나온 여행 에세이에서 ‘2개의 그리운 섬에 대해’라는 원고를 통해(원고는 2011년에 씀) 24년 만에 다시 찾은 스펫체스 섬과 미코노스 섬에 대해 회고했다. 

“미코노스는 내가 『노르웨이 숲』을 쓰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특히 내 안에 일종의 애정이 있습니다. 나는 1986년 9월에 로마에 도착하여 이른 가을의 아름다운 빛 속에서 한 달을 보냈고 아테네로 갔다가 피레우스에서 배를 타고 스펫체스로 건너갔습니다. … 여름의 햇살 가득한 에게해의 섬을 유람선을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을이 되면 그곳이 얼마나 조용하고 때로는 우울해질 수 있는지 알면 놀랄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 계절을 선택했는가? 첫째, 생활비가 저렴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비싼 물가와 집세 때문에 성수기의 그리스 섬에서 몇 달 동안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비수기와 악천후는 조용하고 일을 하기에 적합했습니다. 여름의 그리스는 너무 소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일에 지쳐, 귀찮은 일상을 벗어나 조용히 일에 집중하기 위해 외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면 자리를 잡고 장편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떠나 잠시 유럽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청탁 원고 취재를 위해 다시 이탈리아 시칠리아와 로마로 떠난 하루키는 이듬해 봄 다시 다시 그리스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니 갑자기 무척 크레타 섬에 가보고 싶어져 이번에는 크레타(Creta) 섬으로 향한다. 


호텔에 온수가 나오지 않지만 세월아 네월아 하는 보수공사, 달리는 버스에서 짐이 떨어져 가방에 구멍이 나도 그럴 수 있지, 하는 어처구니의 섬, 크레타. 제일 하이라이트는 ‘술잔치를 벌인 101번 버스’ 이야기다. 마을에서 포도주와 치즈를 받은 운전수와 차장이 버스 안에서 술판을 벌인 것이다. 구불구불하고 위험한 산길을 승객과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며 달리는 버스. 그러나 불안과 함께 먹은 포도주와 치즈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 버스를 다시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했다는 에피소드의 섬이 바로 크레타 섬인 것이다.      

크레타 섬 101번 버스에서의 술잔치. 차장이 치즈를 자르고 운전사 포도주잔을 손님에게 권한다. 


마치 인생의 양지와 같은 하루     


로마로 떠났다 다시 아테네 국제 마라톤 대회 참가를 위해 그리스로 돌아온 하루키는 테살로키니와 카발라를 거쳐 레스보스 섬으로 향한다.      


… 밖으로 나와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 처음 눈에 띤 카페니온에 들어가 찬 맥주를 주문한다. 골이 띵할 정도로 아주 차가운 맥주였다. 조용한 오후, 따뜻한 빛, “레스보스 섬은 그리스에서 맑은 날이 많기로 유명합니다”라고 관광 팸플릿에 나와 있다. 순찰 보트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청과 백의 그리스 국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마치 인생의 양지와 같은 하루.

누군가가 우리를 그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멀리 떠나온 서른여덟 살의 작가와 그의 아내, 테이블 위의 맥주. 그저 그런 인생. 그리고 때로는 오후의 양지바른 곳을.

- 304면 <1987년, 여름에서 가을> -


이후 레스보스 주변의 페트라 섬과 터키와의 접경지역인 로도스 섬을 비롯해 하루키 섬, 카르파토스 섬, 그리고 펠레폰네소스 지방 등을 거치며 3년여에 걸친 그리스 여행을 끝낸다. 그 와중에 잡지사의 청탁으로 아토스 반도의 성산(聖山)이라 불리는 아토스 산의 금녀 구역인 그리스정교 수도원 20여 군데를 3박 4일간 취재하기도 한다(이 내용은 『우천염천』이란 책(개정판은 비 내리는 그리스에서 불볕천지 터키까지)으로 나오는데, 수도원과 아토스 산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로 다음에 해야겠다).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    

 

하루키는 그리스에서 살기 위해 1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메이지 대학의 그리스어 강좌에 다녔다고 한다(물론 이 정도의 실력으로 실생활을 스무스하게 처리하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섬을 떠난 후 그의 작품에 그리스가 등장하는 것은 『스푸트니크의 연인』(Sputnik Sweetheart)에 등장하는 액션 씬에 터키 국경의 로도스 섬에서 페리로 짧은 거리에 있는 이름 없는 작은 섬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쩌면 고대 신화나 지중해 풍경의 아름다움, 훌륭한 음식 탐방 등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리스나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는 책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무심한 듯, 담백하기 그지없는 이 여행기는 지나가는 여행기가 아니라, 지역의 ‘상주 여행가’의 스케치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또한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의뭉스런 문장들은 글쓰기의 괴로움보다 유쾌하기까지 한 상황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루키와 함께 남유럽을 같이 다녀온 느낌이 들게 한다.     

1986년 가을부터 만 3년 동안의 긴 여행. 누구나 다 마흔을 앞두고 하루키와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 작가의 3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또 변화시켰는지 느껴본 사람들은 알지 않을까.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오후에 귀를 기울이면 그 울림이 귀에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502면, 먼 북소리)      

   



1993년 일본에서 처음 발행된 <먼 북소리>는 한국에서 1997년 김난주 번역으로 중앙M&B에서 나왔고, 이어 문학사상에서 윤성원 번역으로 발행되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은 『먼 북소리』 는 이 책이 아닐까 싶은데(나도 이때 읽었다), 2019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세 책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저세상 편집디자인을 자랑한다. 요즘 나온 책일까 싶게 촌스러움의 극치를 이룬다. 이렇게.... 왜일까.       

예스24에서캡처





<표지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Vue_sur_le_port_de_Mykonos.JPG?uselang=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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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azul24/222427103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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