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프로젝트> ⑥ 그리스인 조르바
명작이란,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는, 혹은 이름은 다 알지만 읽은 사람은 없는 책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나에게도 이런 명작이 몇 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 1946)였다.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그리스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어디 한번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2018년 교보문고가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50~60대가 가장 많이 샀고, 또 읽고 싶어 하는 책이라고 한다.1)(10~20대는 『데미안』, 30대는 『위대한 개츠비』)
젊은 사람들에게는 앞으로의 삶의 지표를 만들어 주고,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미처 이루지 못한 꿈과 인생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다시 한번 심어준 책이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두 번이나 오르고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찬사를 받으며 저마다의 ‘인생의 책’으로 추앙받는 이 책을, 그러나 나는 왜 그같은 감흥으로 읽지 못한 것일까? 다 읽고 나서도 이 책을 ‘자유와 해방을 실천한 한 사나이의 이야기’로 봐야 할지 ‘여혐을 일삼는 늙은 마초 이야기’로 봐야 할지 헷갈렸다. 아니,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전체에 대한 이해보다 더 앞섰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숲보다 나무부터 본 게 아닐까 싶어 올해 한번 더 읽어봤다.(역시 책은 두 번 이상 읽어야 제대로 읽었다 할 수 있다. 일 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어찌 그리 새로운지...)
그러나 이 책이 쓰여진 1940년대(책의 실제 배경은 1917년 무렵)의 시대적 상황과 그 당시 (그리스에서의) 여성의 위치 등을 백 번 고려하고, 번역이 너무 과하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의심도 했지만, 비슷한 시대에 나온 다른 ‘명작들’과 비교해보면(예를 들어 『이방인』(1942), 『어린왕자』(1943), 『유리알 유희』(1946), 『인간실격』(1948), 『제2의성』(1949) 등), 이 책에서만 유독 여성에 대한 시각과 묘사들이 처절할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비독립적이어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게 두 번째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야만적인 백정, 양아치로 묘사되었으면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세상 옳은 소리 다 하면서 여자에 관해서만 자기 편할 대로 합리화하는 모습이 현대적 인물로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없다면 순정도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어떤 묘사들이었는지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는 것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백번만번 양보하고, 혹은 이 문제만 쏙 빼고 생각해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숲 전체를 보며 이야기하자고 한다면, 이 책의 매력은 자유에 대한 순수한(원시적인) 갈망과 순간에 집중하고 열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 정신에 대한 찬사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남자)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해답찾기의 교과서처럼 서사가 잘 배치되어 있고, 다양한 곳에서 해석과 감정이입이 펼쳐질 수 있는 ‘거리’들이 풍부하다.
마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토니오 크뢰그』에서처럼 세상사의 필연적인 양가적인 면의 대립을 보여주면서 서로 다른 두 남자의 우정으로 승화하는 ‘브로맨스’의 과정 같기도 하다.
친구로부터 ‘책벌레’이자 ‘가망 없는 펜대 운전사’로 핀잔받던 35세의 주인공은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던 차’에 고향 크레타 섬에 폐광이 된 갈탄광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광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14면)
크레타 행 배를 기다리던 피레우스 항구에서 주인공은 운명의 남자, 조르바를 만난다. 아니, 만난다기보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산전수전공중전을 거치며 거칠게 살아온 태가 온몸에서 풍겨나는 60대의 한 늙은 남자가 불쑥 그의 인생으로 들어온다! 알렉시스 조르바다. 산투르2) 악기를 연주할 때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손마디 하나를 잘라냈을 정도로 저돌적인 이 사나이는 일할 때는 일하는 것만, 잠잘 때는 자는 것만, 키스할 땐 키스하는 것만이 중요한, 어제도 미래도 아닌 오늘, 오직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특히 산투르, 춤, 럼주, 여자가 조르바의 몰입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요소들이다.
화려한 화류계 전적을 자랑하는 프랑스인 오르탕스 부인의 하숙집에 진영을 차린 두 사람은 거친 섬 문화에 이질적으로 겉돌면서 본격적인 탄광사업에 들어간다. 오르탕스 부인의 끊임없는 과거타령과 조르바와의 로맨스, 마을의 아름다운 과부를 비참하게 조리돌림해서 죽이는(실제로 목을 따서!) 마을사람들의 잔인함, 그리스정교의 부조리함 등이 씨줄로 엮이고 여기에 조르바가 들려주는 이야기들과 이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마음의 변화가 날줄로 엮이면서 줄거리는 큰 사건 없이도 거대하게 흔들리는 세계사와 다양한 철학들을 담아가면서 한 편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어간다.
조르바는 내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육체를 부여했다. 조르바가 없으면 나는 다시 떨게 되리라. (228면)
어설프게 시작한 갈탄광 사업이 실패로 돌아선 날, 해변가에서 둘만의 파티를 여는 두 사람.
나는 일어섰다.
“조르바! 이리 와 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 오쇼!”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
나는 새벽에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뛰고 있었다. 내 생애 그 같은 기쁨은 누려본 적이 없었다. 예사 기쁨이 아닌,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극을 이루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418~420면)
조르바를 만나기 전 주인공을 가장 억누른 것은 ‘행동’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친구로부터 ‘행동하기 싫어하는 내 스승이여, 행동, 행동... 구제의 길은 그것뿐’이라는 편지를 받고 움직여 보고싶어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조르바를 만나면서 그의 직설과 몸놀림을 보면서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면서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토록 끼고 읽던 말라르메의 시집이 생명 없는 교묘한 지적 놀음으로 여겨지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개화의 순간인 것이다. 한 남자의 눈뜨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라 할 것이다.
‘조르바=앤서니 퀸’이라는 공식이 세워질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키프로스 출신의 마이클 카코야니스(Michael Cacoyannis) 감독이 각본, 제작, 편집 및 감독을 맡아 1964년에 발표한 이 영화에서 조르바 역에 앤서니 퀸(Anthony Quinn)이, 배질 역에 앨런 베이츠(Alan Bates)가 맡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해변에서 춤을 추는 씬은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되는데, 시르타키(Συρτάκι)라고 하는, 동로마제국 시절부터 유래하던 그리스 전통춤인 하사피코(Χασάπικο)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춤이라고 한다. 영화가 대히트하면서 그리스에서는 원조 하사피코보다 시르타키가 더 유명한 춤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춤을 따라 흐르는 애잔하고도 중독성 있는 주제음악을 작곡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1925~2021)는 영화 <페드라>, <Z>의 주제곡,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등을 작곡한 그리스의 국민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인데, 아쉽게도 이 글을 쓰는 중인 9월 2일에 작고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4UV6HVMRmdk&t=181s
내 마음에 크레타의 시골 풍경은 잘 다듬은 산문, 단정한 어순, 절도 있는 표현, 군더더기 수식을 피한 강력하고도 절제된 산문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타’ 나는 나직이 불러보았다. ‘크레타…’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49면)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99면)
우리는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120면)
버나드 쇼의 묘비명(‘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물론 오역이라도고 하지만)에 버금가게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의 묘비명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시 ‘오디세이’에서 가져온 구절이라고 하는 이 묘비명은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크레타섬 이라클리온 지역에 있는 그의 무덤에 나무십자가와 함께 있다.
불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베르그송과 니체를 통해 인간의 자유에 대한 탐구를 해온 카잔차키스는 특히 조르바라고 하는, 그가 젊은 시절 펠로폰네소스에서 만난 실존 인물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삶을 적은 것이 바로 이 책 『알렉시스 조르바스의 삶과 모험 』(원제)이다.
오디세이 관련 시를 비롯해 6권의 여행책, 8권의 희곡, 12권의 소설과 수십 편의 수필과 편지 등 방대한 작업을 이룬 카잔차키스는 평생을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다양한 오해와 편견들과 투쟁을 벌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비롯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1989년 영화화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 그의 서적들은 불온서적으로 찍혀 금단의책 목록에 올라가는가 하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신성모독을 이유로 파문당하기도 했다. 그리스정교에서 파문당한 사람들의 묘에는 나무십자가를 세운다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책의 유명세만큼 번역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처음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75년이었고, 1980년에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데 이어 2000년에 개정판을 냈는데 이 ‘조르바’는 그리스어-프랑스어-영어를 거쳐 삼중으로 번역된 책이라고 한다. 2014년에서야 영어 완역본(피터 빈)이 나왔는데, 이를 김욱동 교수가 번역하여 낸 ‘조르바’도 있다. 그리스어 원전 번역본은 2018년 한국외대 그리스·불가리아어학과 명예교수이자 그리스문학 연구자인 유재원 교수가 펴낸 『그리스인 조르바-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이 처음이라고 한다.
(내가 읽은 ‘조르바’는 2009년 열린책들에서 신 판 6쇄로 나온 이윤기 번역본이다.)
한국에 출간된 대표적인 ‘조르바’들. 이윤기 번역의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유재원 번역의 『그리스인 조르바-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문학과지성사), 김욱동 번역의 『그리스인 조르바』(민음사), ⓒ 예스24에서 캡처
표지: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이 된 크레타 섬의 스타브로스 해변의 최근 모습. (C)athensinsider.com
1)https://www.ekn.kr/web/view.php?key=345439
2) https://en.wikipedia.org/wiki/Sant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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