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던 길을 되돌아 나온 박지원과 수진은 서편 천주당을 나와 북적이는 길거리로 합류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지원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폭풍우가 마구 치며 요동칠 걸 잘 알기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숙소인 서관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들어서자 꽤나 한적해졌다. 수진은 어제처럼 오늘도 밤까지 마쳐야 할 빨래며 집안일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총알처럼 빨리 걷고 있었다. 문득 지원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뒤돌아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그는 길 위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힘차게 들고 확신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얘야,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 지들이 무슨 수로 날 열하로 보내? 혹 보낸다 한들 정사와 사행단이 여기에 있는 데 아무 직함이 없는 나를 무슨 수로 보낼 수 있겠느냐? 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너도 마음 쓰지 말거라. 알겠니? 우리 둘 다 잠시 미친놈들 소굴에 갔다 온 거야. 그런 거야, 암 그렇고말고.”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그였다. 그녀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관 문으로 향하였다. 지원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곧장 주방으로 향하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입구 안쪽에 빨래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 많은 빨래를 커다란 대야에 담고 머리 위에 이고서 그녀는 개울가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마음속으로 아까 그에게 전하지 못한 답변이 무릇 떠올랐다.
‘저도 아저씨 말처럼 별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요.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밝은 달빛이 내비치는 빨래터에 자리를 잡은 후 소매를 팔뚝까지 걷고 일을 시작했다. 롤리마을 집에서는 세탁기가 다 알아서 해 주었는데, 그것도 할머니가 다 해주셨는데, 여기선 이렇게 직접 퍼 올린 물에다가 손으로 비벼 빨아야 하다니. 참으로 고약한 인생 같았다. 그나마 여름이니 망정이지 만약 겨울이었으면. 옛날사람들은 겨울에 어떻게 세탁을 하고 살았을까? 그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열심히 비벼댔지만 어째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얼룩이나 때가 잘 빠지지 않았고 점차 온몸의 힘은 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꿇어앉은 무릎과 허리가 아파오자 화가 열불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물이 담긴 대야를 냅다 발로 차며 마구 화풀이를 쏟아냈다.
“아이씨, 짜증 나! 짜증 나, 진짜.”
“아이쿠!”
이런, 하필 그것이 걸어오고 있던 사람에게로 날아간 것이다. 게다가 정통으로 던져져 그는 물벼락까지 맞고 말았다. 단단히 일을 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목소리가 어째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인데.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환한 달빛 아래 서 있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아니 쟤는 이안이잖아? 이안 일룸니아야.
그녀는 벼락을 맞아 감전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모든 동작을 일시에 멈추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넘어온 바로 여기 청나라에서, 그것도 연경의 개울가에서, 그가 마법처럼 뿅 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는 1780년대에 살던 영국귀족처럼 차려입었다. 남색의 화려한 망토를 걸치고 무릎을 다 덮은 하얀 양말에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녀는 불쑥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지원아저씨처럼 외모만 닮고 자신을 모른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심은 단번에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수진, 이거 환영인사 치고 너무 거한데?”
그가 대야를 들고 그녀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젖은 망토를 손으로 털었다. 그러면서 한복을 입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은 서로 알아차렸다. 못 보던 사이에 제법 성장한 것이다. 어느덧 열여섯이 된 이안은 어린 티를 벗고 꽤나 멋있어졌다. 비록 뱀파이어지만 놀랍게도 성장 중이었다. 열다섯 살이 된 수진 역시 키가 좀 크고 요조숙녀 티가 제법 흘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지난날 브라잇 동맹에서 뛰쳐나오던 그날의 분노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롤리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다 잊었다고 여겼었지만 사실 그것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바늘이 되어 가끔씩 잊을만하면 그녀의 마음속을 쿡쿡 찌르곤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보자마자 현재 처한 상황인식보다 과거의 그 일이 먼저 떠올라 마음속의 쌓아온 깊은 분노를 와장창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흥, 드론에 떠밀어 보낼 때는 언제고 뭐 하러 찾아온 거야?”
말을 마친 그녀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휙 뒤돌아섰다. 그러나 이안은 싱글벙글하며 그녀 앞으로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건네었다.
“샤를르 리가 너를 본 것 같다 해서 설마 했는데 진짜네. 근데 어쩌자고 이 과거로 오게 된 거야? 응?”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입을 삐쭉 내밀자 그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제스처였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흥분이 가라앉아 차분해졌다.
“수진, 그때 요툰하임에서 널 보낸 건 나도 히든벅도 어쩔 수 없었어. 너를 더 이상 우리 곁에 붙잡아 두기 힘들었거든. 혹 마왕이 다시 너를 쫓을까 봐 두려워서. 다 너를 위한 일이었어. 그러니 이제 그만 화 좀 풀어.”
“다 나를 위한 일이었다고? 난 그때 브라잇 동맹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너랑 히든벅 둘이서 결정한 거였잖아!”
“다 너의 안전을 위해서였다니까! 마왕으로부터 널 보호하기 위해서. 그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어. 옳은 선택이었다고.”
“너에겐 옳은 선택이었겠지. 하지만 나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어. 나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어야 했는데 아예 무시해 버렸다고. 마왕이 노리든 말든 난 동맹에 머무르고 싶었어. 떠나기를 전혀 원치 않았다고. 내 몸은 내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네가 마왕에 대해 뭘 알아? 그리고 난 뭐 혼자 남고 싶었는 줄 알아?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그가 눈을 부릅뜨며 같이 화를 냈다. 그들은 서로를 무섭게 째리며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가 한이 맺히면 엄청 무서운 법. 결국 먼저 항복하며 눈길을 내린 건 그였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는 백기를 흔들었다.
“알았어. 다음엔 그렇게 할게. 너의 선택과 의견을 존중한다고? 오케이?”
그 말을 듣자 그녀의 마음은 누그러들었다. 그래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랬다니까 마음속에 꽁꽁 눌러놓았던 분노의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동안 흐른 시간의 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삐진 표정이었지만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그녀가 맞받아쳤다.
“또다시 그러면 국물도 없는 거야. 그나저나 이안,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공부 못하는 나를 하늘이 벌하는 걸까?”
그녀는 지원의 방구멍으로 튀어나온 일부터 시작하여 오늘 브라잇 동맹위원회 연경지부에 갔던 일까지 빠른 속도로 썰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와이즈맨’ 이란 이름만은 그에게 숨기었다. 그냥 어느 마법사라고만 했다. 그가 만약 이름을 듣는다면 눈이 뒤집혀서 지금이라도 당장 미친 듯이 뛰쳐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꼬치꼬치 캐묻진 않았다.
어느새 빨래 같은 건 다 잊은 채 그들은 개울 뒤쪽의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가 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는데 뭔가 확신하지 못하는 투였다.
“신기한 일이군. 난 그저 샤를르 리를 따라온 것뿐인데. 너를 여기서 만난 건 순전히 전혀 예상 밖이라고. 한번 잘 따져봐. 우연치고 뭔가 석연치 않지 않아? 물론 널 본 건 무척 기쁘지만 말이야, 수진.”
“게다가 초록갓의 지원 아저씨랑 지금 사행단 아저씨랑 완전 판박이야. 근데 날 전혀 못 알아보셔. 너도 보면 분명 깜짝 놀랄걸. 근데 샤를르 리가 어디서 날 알아봤데?”
이안은 곰곰이 사색에 빠져있었다. 잠시 후 뭔가 중요한 걸 깨달은 듯 그는 바위 위로 사뿐히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영웅명부에 네 이름이 적혀있었다니. 이건 절대 그냥 우연이 아니야.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고. 샤를르 리가 재밌는 시간여행 안 해보겠냐고 해서 난 그냥 따라온 것뿐이야. 근데 너도 갑자기 과거로 보내졌고. 왠지 그가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샤를르 리가 어디서 날 알아보았냐고?”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답변이 자꾸 안 나오자 그녀가 성을 내며 톡 쏘아붙였다.
“어? 아, 왜 네가 말한 박지원의 하인 창대 말이야? 강시로 변한. 그때 강시들을 붙잡으러 갔던 자들이 바로 샤를르 리와 그의 동행인이었어. 네가 골목에서 무릎에 매달린 이가 바로 샤를르 리였다니까. 딥언더니아에서 만났던 거 기억하지? 그는 아는 척을 할까 말까 주저하다가 주위에 하도 눈들이 많기에 그냥 모른 척해버렸데.”
수진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 괴물같이 흉측하게 변한 강시들과 이안이나 샤를르 리가 서로 잘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괴물이고 이들은 우아하게 피를 마시며 잘 차려입은 인간 같은 뱀파이어라 생각하면 될까? 하지만 이안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문득 겁이 난 그녀는 엉거주춤하며 그에게서 좀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살짝 우울해졌다. 하지만 체념한 듯 더 이상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원이 창대 걱정을 하던 것을 떠올리고 다시 물었다.
“저기, 그럼 그 강시들은 어디로 데려갔어?”
“지금 우리 숙소에 있어. 아직 어찌할지 샤를르 리가 결정을 못 내렸나 봐. 아무튼 동행인이 문제라니까. 행동하는 게 영 어른 같지 않아. 매번 문제만 일으키고 완전 골칫덩어리야.”
이안이 면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궁금해졌다.
“동행인?”
“나이를 엄청 많이 먹은 백작이래. 나보고 ‘꼬마’라고 부르며 꼬장꼬장 가르치려 든다니까. 꼬마는 무슨 꼬마야? 샤를르 리는 그가 원로이시니 존경심으로 대하라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냐? 아, 맞다. 그걸 갖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
“뭐?”
대답을 하려는 그의 얼굴에 전에 배어있는 우울함이 싹 벗겨지고 그 나이 또래의 발랄함이 가득 찼다. 뭔가 굉장한 걸 자랑하려는 듯 잔뜩 뽐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생각나? 왜 예전에 키릴장막아케이드 넘기 전에 저녁식사에 초대했던 ‘이장’ 말이야? 왜, 너처럼 한국에서 왔고 산신령전자에서 일한다던 그 사람. 그 사람이 정말로 일을 냈다니까. 얼마 전 오나시아에서 스마트폰을 선보였는데 아주 굉장해. 지금은 아마 전 동맹에서 팔리고 있을 걸. 나도 구입했는데 혹시나 해서 하나 더 샀거든. 카할에게 보내주려고. 근데 네가 가지면 되겠다. 그거면 어디에 있던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신기하게 여기 과거에서도 통화가 되더라고. 아니다, 다음에 갖다 줄게. 오늘은 너무 늦었다. 근데 이건 다 뭐래?”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빨랫감을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바위에서 벌떡 내려왔다.
“아이, 나 어떡해, 어떡해.”
그녀는 울먹이는 투로 중얼거리며 대야에 물을 거칠게 부은 후 남은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좀 놀란 눈치였지만 그녀가 낑낑대며 고생하는 걸 보니 처음엔 고소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눈치껏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냐 란 의미가 담긴 곁눈질로 그녀가 째려보자 그는 잽싸게 옆으로 다가와 소매를 걷으며 돕기 시작하였다. 사실 말이 돕기지 그가 남은 빨래를 다한 셈이었다. 뱀파이어의 강력한 힘으로 세탁기모터보다 훨씬 빠르고 힘있게 그것을 주무르고, 있는 힘껏 탈수까지 해줬다. 그래서 일이 금방 끝났다.
그녀 대신 무거운 빨래대야를 머리에 인 그가 서관 앞까지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아무도 없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그는 당장 그것을 그녀에게 내던졌을 것이다. 예전 딥언더니아에서 우란의 옥수수바구니를 들었을 때를 회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