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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 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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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Dec 16. 2021

손님

툇마루에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오면 나는 마당에 나와 바닥에 열심히 글자를 적는다. 머릿속에 스치는 내가 아는 모든 단어들을 적어본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이가 묻는다. 두 손가락을 얹으면 폭 덮여 사라질 것만 같은 작은 입술을 모아 열심히도 조잘댄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글자가 무어냐 묻는다. 그럼 나는 작은 머리통에 가만 손을 얹고서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기쁘다는 것이란다. 옆의 글자를 가리켜 또 무어냐 묻는다. 반갑다는 것이지. 아이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길게 나오는 목을 보니 문득 떠나간 이의 목이 떠올랐다. 팔에 두르고 있던 천을 급히 풀러 아이의 목에 가볍게 매어준다. 그도 꼭 이렇게 푸른 날 돌아오겠다며 푸른 날 떠나갔더랬지.


흐르는 구름에 잠깐 눈길을 빼앗긴 사이 아이는 어느새 마루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를 보더니 구름만큼이나 희게 웃는다. 제 곁을 아주 작은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치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떠나간 이를 닮았다. 이 아이와 하이얀 눈을 맞기 전에 오시면 좋으련만. 곁에 다가가 앉으니 내 무릎에 포옥 하고 제 고개를 기대어온다. 치맛자락 위로 팔 하나도 얹어온다. 그 모양새가 귀여워 나는 한참이고 팔 끝에 달려 활짝 핀 꽃 같은 손바닥을 조물조물하여 본다. 그럼 아이는 글자를 써달라 졸라댄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 물음이 돌아온다. 떠나간 이가 이런 아이의 영특함을 알면 얼마나 흐뭇해할까 싶은 생각을 하니 순간 발끝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작은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얹고서 획을 천천히 긋는다. 좋다는 것이지요? 하늘을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오늘 유독 말갛다. 나는 아이를 향해 웃어 보인다. 그럼 아이는 방금까지 마당에서 함께 놀던 병아리처럼 밝은 웃음소리를 낸다. 나는 이런 시간이 좋은데, 떠나간 이도 이 시간을 좋아하려나. 골몰히 마당 너머 대문간을 바라본다. 그러자 이내 소리가 들리고 대문이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다 곧 대문을 향한다. 우리 함께 웅크리고 지낼 겨울님이 오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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