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베트남 여행을 갔다가 귀국하는 중 있었던 일이다.
출국 시간은 베트남 기준 오후 9시 30분, 한국 시간으로는 밤 11시 30분이었다. 5시간 비행이니 한국에는 대략 새벽 6시쯤 도착할 터, 다음날을 깡그리 잠으로 날리지 않으려면 기내에서 쪽잠을 자두어야 했다. 베트남 저가 항공사의 비즈니스 석은 국적기의 이코노미 석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좁았다. 좌석에 몸을 잔뜩 말아 웅크린 채 머리를 좌로 두었다 우로 두었다 뒤척이며 영 잠에 들지 못했다.
이 날을 위해 처방받은 수면제를 삼켰다. 마지막 비기가 효과를 발휘해야 할 텐데. 간질간질 달콤한 꿈속을 헤집어 드는 듯한 기분도 잠시, 3세 미만으로 추정되는 영아의 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한국 시간으로 아마 새벽 2시쯤의 일이었다. 번쩍 소스라쳐 깨어버렸으니 마지막 보루로 먹었던 수면제는 그 수명을 다한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바로 뒷자리의 아이였다. 말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것 같았다. 새된 울음소리는 투정 수준이 아니었다. 매우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고, 문제를 즉시 해결해 달라는 다급한 구조 요청이었다. ‘뭐라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지금 뭐가 필요한지는 부모가 제일 잘 알지 않나?’라는 사나운 원망이 들었다. 비명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5분간 참았다. 5, 4, 3, 2, 1! 저렇게 울다가는 경기라도 일으키지 싶었다. 못 참겠다는 눈치를 주려고 뒤돌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잔뜩 울상이 되어 귀를 틀어막고 있었고, 아빠가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며 쩔쩔 매고 있었다. 세상 곤란해하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미안합니다’라고 서툴게 표현하는 듯한 눈빛을 외면했다. 속 좁은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아이를 동반하여 비행을 해 본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쓰러운 에피소드가 많다.
샤론 언니 왈,
“유나 데리고 말레이시아 갔다 오는 비행기에서 너무 고생했어. 유나는 모기에 잔뜩 물려서 얼마나 가려웠겠니. 말은 못 하고 계속 우니까, 유나를 안고 그 긴 비행시간 동안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수십 번은 걸어 다녔어. 그동안 내 남편은 뭘 하고 있었는지 아니? 차분하게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영화를 보고 있었어. 남편의 뒤통수를 총으로 쏴버리고 싶었어, 진심으로.”
또 다른 지인 왈,
“작년 제주도 비행기 안에서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아이 낳기 전에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니 짜증스럽기만 했는데. 내 아이가 지르는 울음소리 때문에 고통받았을 다른 분들께 얼마나 죄송하던지. 일어나서 고개 숙이고 인사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게 후회가 돼. 나도 머릿속이 하얘졌었거든.”
누군가는 우리 사회를 일컬어 "아이를 미워하는 사회"라고 했다. 아이의 귀여움과 천진함을 찬양하지만, 그들의 ‘귀찮은’ 속성은 대체로 견디지 못한다. 아이는 물론 예쁘다. 사랑스럽다. 하지만 ‘양육’ 또는 ‘부양’은 예쁘고 밉고를 넘어선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실이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각설하고,
최근에 아기를 안아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NO’이다. ‘YES’였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부모만 허락했다면 아이를 잠시 안고 달래 보았을 것을, 애달픈 감정을 나누어 가졌을 것을, 아이의 무구를 이해하는 제삼자의 너그러움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을 것을.
두 손으로 양쪽 귀를 꼭 틀어막고 있던 엄마의 미간 주름, 초조함이 그렁그렁해 넘칠 듯한 아빠의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부모는 아이로 인해 무시로 죄인이 되는 것일까.
결국 나는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역시, 다음날 하루를 몽땅 잠으로 날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어쩌랴,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도 무탈히 집에 도착했겠지. 그나저나 여독은 풀고 있으려나, 잠은 제대로 자고 있으려나. 수시로 고되었을 그들의 여정을 떠올려 보면, 아이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보통의 사랑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