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팀장님을 마주할 때, 나는 울화통이 터진다. 울화통이 오래가면 쉽게 우울증으로 전환된다. 때로, 결이 맞는 동료나, 오랜지기 친구도 내 맘 같지 않아 삐걱거릴 때가 있다. 김 팀장이야 그렇다 쳐도, ‘제법 안다’라고 생각했던 동료나 친구가 갑자기 낯설어질 때… 섭섭하다. 나는 사실 내내 혼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급격히 외로워진다.
내가 좀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것이 있다. 우리는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므로, 가히 통제할 수 있다’라는 믿음은 큰 착각이다. ‘통제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종국에는 나의 괴로움과 번민의 가장 큰 원천이 된다.
비단 ‘사람’ 뿐만이 아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과거나 미래 등 대부분은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과거)’이라는 후회, 또는 ‘내가 열심히 하면 그만큼의 보상을 받을 것 (미래)’이라는 확신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내가, 못나서, 처신을 잘못해서, 불우한 처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하니까. 혹은 불우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고 지레 겁을 먹으니까.
괜찮으니, 정말 괜찮으니, 이제 그만 놓아버리자.
마음이 평화를 찾는 길은 하나뿐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 사건 그리고 과거 등-을 감히 ‘바꿀 수 있다’라며 자만하지 말자. 통제 불가한 영역은 그대로 남겨 두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 사람 또는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감정’은 최소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 영역에 힘을 쏟는 것이 차라리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듯하다.
나는 좀 더 대범해지길 바란다. 내가 바꿀 수 없는 미래와 과거에 압도당하지 않길 바란다. 내 능력과 책임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몸과 마음의 병을 자초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문제들을 모두 짊어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꿈쩍 안 할 바위들은 머릿속에서 냅다 던져 버리고 ‘아, 몰라~’ 하는 정신으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뒷담화 하는 지인이든, 나를 미워하는 상사이든, 천년만년 바뀌지도 않는 가족의 기벽이든, 지웠으면 하는 흑역사이든, ‘아, 몰라~’ 하고 뻔뻔! 해졌으면 좋겠다. 이것은 방치나 방임이 아니다. 하등 쓸모짝 없는 괴로움으로부터 나를 구해내는 지혜이다. 한없이 소심쟁이인 내가, 제일 만만한 나 자신을 몰아붙일 걸 아니까. 그래서 이렇게 외쳐본다. “That’s your problem!” (나는 할 만큼 했어. 그 이상으로 나를 비난한다면, 그건 니 문제야!) 그러니까, 그건 니 생각이란 말이다.
반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에 관련해서는 철저히 컨트롤하고자 하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나는 가족의 기벽을 고칠 수 없지만 (사람 바꾸기 쉽지 않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 나는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 없지만, 현재에 충실할 수는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가능한 변화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나의 인생은 되었다.
물론 이 방법만으로 인생이 행복해지리라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 그리고 사람과의 갈등,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나는 번번이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융통성은 좀 부릴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감정’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다니고 싶진 않다. 매번 나를 샌드백 삼고 싶지 않다. 때론 ‘아, 몰라~’ 반쯤 눈감으며 나의 정신 건강을 챙기련다.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의 그 유명한 기도문인 <평온을 비는 기도>를 ‘또’ 인용하여 본다. 거듭 인용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