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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Apr 05. 2023

Q.  ‘또’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하나요?

A.  ‘삼십육계 줄행랑’입니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2016년 일본에서 방송되었던 한 드라마의 제목이다. 실제로 시청한 적은 없으나, 재미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이 특이한 제목은 헝가리 속담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생에서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괜찮다는 의미이다.


‘도망’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우리 의식의 원형으로부터 그렇게 승계되어 온 듯하다. 전설, 동화, 신화, 기타 등등에서 용자는 언제나 ‘맞서 싸우는 자’로 현현되어 있지 않던가.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라?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라! 맞서 싸워 해결하라! 이러한 자동 사고 과정이 자못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1+1은 언제나 2라고 할 수 없었던 지난날을 겪고 보니, 성급한 일반화는 절대 금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마주했을 때는 일단 도망치는 것이 답이다. 늦은 저녁 칼 든 강도를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회피하고, 숨고, 줄행랑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때가 있다.


유리 멘탈의 소유자인 나는, 매우 자주, 스트레스에 깔려 죽을 것만 같다. 산적한 문제에 일일이 신경을 쏟다 보면, 빠르게 번아웃 되어 하얀 재로 남고 만다. 열정도 예전만 못한 지금은, 일단 도망치고 본다. 나 몰라라, 하며 일상을 외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잠’이다. 이것은 체력과 멘탈을 회복하는 데 좋은 방법이다. 다만 물리적으로 ‘한결’ 도움이 될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깨어나면, 문제는 그 자리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단연 ‘여행’이다. 김영하 작가는 그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한편, 해당 책의 직관적인 목차 하나에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무시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시간과 돈이 여의치 않다. 이런 이유로 나는 좀 더 광의의 ‘여행’을 즐긴다. 가성비가 좋은 것은 각종 콘텐츠이다. 나는 책으로, 영화로 도망친다. 타인이 생산한 문장과 영상 속으로 빠져든다. 낱낱의 단어가 적재적소에 비치된 문장에 희열을 느끼고, 디테일이 섬세하고 감각적인 미장센에 경탄한다. 결결이 조화로운 모습을 감상하는 기분은, 피사의 사탑이나 파리의 에펠탑이 주는 카타르시스에 버금간다. 그 와중에 나는 자의식과잉의 올가미로부터 살금살금 벗어나기도 하고, 상한 마음을 정성껏 핥기도 하며,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기도 한다. 한편 어마무시하게 느껴졌던 문제가 과대평가된 것임을 깨닫기도 한다. 호미로 막을 것은 호미로 막는 것이다.


‘도망’이란 결코 우매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내 앞에 놓인 것이 위험한 길임을 인지하고, 다른 방향으로 몸을 트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삶에 필요한 용기이자 지혜이지 않을까.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무소처럼 뿔을 세우고 달려오고 있다면, 일단 도망치시라. 다만 등을 돌린 뒤에는 각각에 맞는 생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녕 뾰족한 수가 없다면 숨는 수밖에 없다. 상처가 났다면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동안 숨을 고르고 냉정을 찾을 수 있다. 그 유명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조언하였듯, 소리 죽여 동굴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다. 책의 저자 존 그레이는 ‘남자가 동굴로 들어갈 때는 대개 마음이 상했거나 정신적으로 과도한 긴장을 느껴 혼자서 조용히 해결하고자 할 때이다’라고 했지만, 남녀 불문 보편적으로 현명한 선택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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