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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 Lee Mar 04. 2021

(4) 2021년 3월 4일

빨간 니트의 일기


"조금 있으면 새 친구들이 올 거야. 청바지 두 장, 폴라티 두 장, 카디건 하나..."


조금 늦은 시간에 귀가한 그녀가 코를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며 말을 건넨다. 흥얼거리며 말하는 게 퍽 기분이 좋은가보다. 또 쇼핑을 한 모양이다. 얼마 전에 낡은 옷들을 버린다고 오래 함께 한 친구들을 헌 옷 수거함으로 보내더니 새 친구들을 불렀나 보다. 매 해 일어나는 일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다.


햇수로 6년째, 나는 그녀와 함께 하고 있다. 우연히 호텔 연회장에서 만난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가슴팍이며 배에 내 몸을 밀착시켜보오? 하더니 이미 들어가 있던 처음 보는 애들 틈바구니로 나를 끼워 넣었다. 어지러워서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그녀의 집으로 와 있었다. 백화점에서도, 아렛에서도 간택받지 못한 나는 그렇게 느지막이 인생역전인지 중고 신입으로의 입사인지 모를 니트 인생의 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퍽 좋아했다. 그만큼 아꼈다. 친구들과 찍는 우정사진에도 나를 입고 찍었고, 겨울에 영하 10도가 내려가는 한파에는 고민도 하지 않고 나를 입어주었다. 나의 자존감은 한없이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목에 끼우면서 자기 퍼스널 컬러가 비비드 레드라며 역시 나를 만난 건 운명이라고 까지 했으니. 그 말을 같이 듣고 있던 다른 애들은 피식 웃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듣던 그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고마웠다. 옷을 정리할 때마다 나를 제일 편한 자리에 가지런히 개어 주는 것도, 나를 입으며 한 번도 슬프지 않은 것도, 모두 고마웠다.


그런데 올해 그녀는 나를 단 한 번 찾았다. 아마 빌어먹을 이상기온 현상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올해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고, 그녀는 성인 이후로 구옥에 10년 넘게 살던 습성이 몸에 밴 까닭에 관자놀이부터 발가락 끝까지를 괴롭히는 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춥다고는 하는데, 오히려 너무 많이 입으면 힘들어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얇은 친구들이 새로 많이 들어왔고, 그 아이들은 한 두 해 그녀와 함께하고는 이사 또는 계절맞이 정리 시즌과 함께 사라졌다. 참 많은 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내가 오고 난 직후 몇 년 간 그녀 생각보다 저렴한 물건을 자주 사서 입는 듯했다. 대부분의 20대 중후반이 그러하듯 인터넷 쇼핑몰에서 가성비가 돋보이는 친구들을 간택한 모양이다. 그러기를 여러 해, 그녀도 나이가 들었는지 재작년 이후로는 새 친구들이 뜸하게 들어왔다. 대신 먼발치에 있는 행거로 들어온 친구들이나 증축한 수납함으로 들어온 새로운 종들이 넘쳐났다. 셔츠, 블라우스, 코트. 레깅스, 여기 들어오는 게 맞나 싶은 스트릿 브랜드의 오버핏 티셔츠 등등.

  

그것 마저도 올 겨울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뜸해졌다.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쇼핑만 잘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쇼핑을 그리 하지 않는 그녀가 괜찮은지 혹시 우울하지는 않은지 걱정이 된 것이다. 언뜻 보기에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 그냥 옷이 아닌 다른 것을 사나 보다 싶었다. 그렇게 올 겨울을 그녀를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며 지냈다. 매일 아침 무얼 입을까 고민하며 속옷 차림으로 멍 때리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게 제일 웃겼다.


"나는 뭐 수납함에 붙은 껌인 거 같아. 밖으로 나간 지가 언제냐."


"야 껌이면 다행이게, 걸리적거리기라도 하지. 쟤  나 산거 잊어버린 거 같음."


주변에 있는 애들이 그녀를 향해 아우성을 쳤지만 그녀는 익숙한 옷들을 돌려가며 겨울을 보냈다. 그 친구들은 결국 2월 끝자락에 이 집을 떠나야 했다. 나도 혹시 이제 짐을 싸야 되나 싶었는데, 그녀는 고민도 하지 않고 나를 다시 수납함으로 돌려놨다. 이쯤이면 올해 한번 찾은 나에 대한 미안함인가, 퍼스널 컬러에 대한 집착인가. 내년이면 7년. 아이돌로 치면 재계약 시즌인데 그녀에게 더 이상 날 찾지 않을 거라면 당근을 통해 FA라도 되게 해달라고 말해볼 참이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납장 밑바닥에 등을 기대고 누워 며칠 내로 새로 올 친구들을 생각한다. 너네는 부디 오래 살아남기를, 너네는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애착템들되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상처 받지 않기를, 찾지 않을지언정 제 손에 들어온 것을 상하게 하진 않는 사람이니 어디든 다시 당당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아 오지랖이 너무 심했나.


봄이 오고 있다. 그녀의 봄 옷장은 부디 색채가 가득하길. 올 겨울은 유난히 무채색이었으니. 애착템이 애정 하는 마음을 담아 바란다.









옷장을 갈아엎은 후 미친 듯이 쇼핑을 저지르고 씁니다.

왜 옷은 사도사도 입을 게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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