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일 없는 사람
“난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내 경력은 주로 미래에 달려 있지요.”
- <겨울 꿈>,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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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의 대표를 만났다. 차가우면서도 반듯한 인상을 지닌 사람으로, 양옆으로 찢어진 두 눈이 매섭게 빛나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냉정한 시선이 너무나 날카로워서 나는 정말로 한기를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사무적일 수 없을 만큼 무뚝뚝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경력에 대해 설명 좀 해주세요.“
그래, 경력이라. 경력만 놓고 본다면 나는 별 볼일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실 나의 경력이라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견디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았던 결과였다. 열정이나 야망, 원대한 포부가 있어서가 결코 아니었고, 그저 못 참겠어서, 숨이 막혀서,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회사를 전전하게 된 것일 뿐이었다. 나는 경력 뒤에 숨겨져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으면서 느긋한 척을 했다.
내가 그렇게 느긋한 척을 하고, 내 앞의 대표도 대표로서 어떤 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진실되지 않은 문장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허황된 문장들 중에서도 분명 중요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나는 최선을 다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꾸준히 경력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지나온 경력에 대해서, 왜 그런 경력을 갖게 되었는지, 나의 경력에 스스로는 만족하는지까지도. 그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서도 서스럼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영화 같은 인생을 산 셈이었고, 그야말로 엄청난 주인공이었다. 주인공 같은 그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떤 경력을 갖고 싶어요?”
이 질문에는 이미 답이 있었다. 나는 특정 직군에 대한 면접 자리에 있었으므로 그 직군으로서의 경력을 갖고 싶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 답답한 느낌 때문에 나는 내 인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퍼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으며,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내 삶이 잘못된 쪽으로 가고 있음을 내가 깨달았다고 해도, 당장 바뀌는 것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내가 해 온 경력이 이것이라면, 안타깝지만 나는 이 경력대로 계속 살아야만 한다. 경력은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회사가 속한 업계에 대해 나는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그 업계의 그 직군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그래서 관련된 경력을 쌓고 싶다고, 정말이라고.
나는 그런 식의 말을 했고, 그런 식의 표정을 지었으며, 그렇게 무엇이든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거짓 자신감을 내보였다. 아니다, 사실 거짓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할 수 있을 것이고, 할 수 없어도 해낼 것이라고. 그동안 해온 경력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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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는 한참 동안 경력을 토대로 버텼다. 아닌가. 경력을 위해 버틴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는 경력이 곧 나고, 내가 곧 경력인 것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경력은 나보다 더 나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흠, 경력이 이 정도인데...“
라고 어느 날에는 인사팀 소속의 사람이 나를 붙잡고 말했다. 그는 이마 윗부분의 머리카락이 휑하게 벗겨져 있는 사람이었다. 두 눈이 앞으로 심히 돌출되어 있어서 과연 건강은 괜찮은 건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툭 튀어나온 구슬 같은 눈으로 나를 보지 않고, 서류 위의 내 경력만 보고 있었다.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지.
‘경력이 이 정도인데... 성과가 더 나야 하지 않아?’
나는 그의 말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열심히 할게요.“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낯선 그 사람을 붙잡고, 안 그래도 아파 보이는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요. 제가 이 일이 정말 힘들어서요. 어쩌다 보니 경력을 이렇게 쌓았는데요. 원해서 그런 건 아니거든요. 제 탓을 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진심으로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할 수만 있다면 경력을 아예 바꾸고 싶어요. 어떤 경력으로 바꾸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이 또한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나는 쏟아지는 말을 삼키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열심히 하겠다는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경력 이상의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나의 경력은 내가 해낼 수 있는 최대치였던 것이다.
그렇게 버티는 중에 한 선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김 팀장님이 어떻게 팀장이 됐는지 알아? 계속 버텨서 된 거야. 회사 오래 다니다 보면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버티는 사람이 승자라는 거야. 같은 팀, 같은 자리에서 무조건 버티기만 하면 뭐라도 되는 거라고. 계속 버티다 보면 너도 파트장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버티는 것도 능력이다. 이 거대한 회사와 복잡한 업무, 간교한 정치판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갈아내며 버티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이고, 희생이다. 그래, 버티다 보면 경력도 더 쌓고, 빛도 볼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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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 버티던 어느 하루였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문서를 살피던 중에 갑자기 화면 안의 모든 글자가 깨져서 보이기 시작했다. ‘기획안’이라는 글자는 ‘ㅎㅣㄱㄴㅇㅏㄱ’ 이런 식으로 보였고, ‘2024’라는 글자는 숫자 하나하나가 가위로 잘린 것처럼 끊겨 보였다. 모든 글자가 모니터 안에 쪼개져서 떠다녔고, 그래서 단 한 글자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어쩌면 나는 정신이 나가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끝이었다. 나도 끝이고, 내 경력도 끝이다.
나는 허우적거리고 비틀거리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손이 떨렸다. 곧바로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거리에는 멀쩡한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들 중 몇 명이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냥 정신이 나간 건 아니라고. 나보다 내 경력이 더 우월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모든 건 경력 때문이라고.
주저앉아서 울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어서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랬더니 모니터 속 글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자리에 있었다. 다행이었다. 정말 정신이 나간 건 아니었으니까.
모니터 안에 자리 잡은 글자들이 문득 내 인생 같았고, 내 경력 같았다. Backspace 키를 눌러서 지우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겠지. 그동안 버틴 시간이 몇 년인데. 고작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그 많은 시간을 버티며 살아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글자들을 모조리 다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날로 퇴사를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경력은 그날로 끊기고, 사라지고, 헛되이 날아갔다.
그 이후 한동안은 두려웠다. 경력 없는 삶은 아무것도 아닐까 봐. 나보다 더 우월했던 나의 경력이 더 이상은 나를 포장해 주지 못하니까.
그러다가 생각했다. 무슨 회사, 무슨 역할, 무슨 프로젝트, 무슨 평가, 무슨 기여도. 이런 경력을 다 떼어낸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동안 나는 거짓을 앞세워 경력을 만들어냈다. 느긋한 척을 했고, 자신 있는 척을 했으며, 버티는 척을 했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었더니 더 이상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인생에 지워야 할 어떤 무언가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Backspace 키를 눌러도 지울 것이 없는 삶이 된 것이다. 그랬더니 움츠러들지 않게 되었다. 버티지 않아도 되었다.
“네가 버텼어야 했는데.”
선배는 우리집까지 찾아와서 넋두리를 했다. 본인도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다며. 나는 자기 자신보다 더 잘 버틸 줄 알았다고. 왜냐하면 너는 경력도 좋고, 그래서 미래도 나보다 더 창창할 것 같았으니까. 이런 말을 했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쩌면 나는 좌절하거나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다 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경력이 사라진 나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내 그대로의 모습이거나, 또는 예상하지 못 한 다른 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선배를 배웅했고, 선배의 버티는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