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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리 Dec 09. 2020

이북 리더기 3년차, 이제는 쓰지 않는 3가지 이유

이북 리더기를 떠나 보내며

     한 3년 전쯤, 크레마 사운드를 샀습니다. 하얗고 깨끗한 무광택의 재질과 둥글둥글한 모서리, '책'을 읽는 전자 기기로서의 외관은 훌륭했습니다. 드디어 물리적인 책의 한계에서 해방되어 책을 엄청 많이 읽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더해져, 아주 만족스러운 소비였습니다. 여태 그런 이유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독서량은 늘었으나, 오히려 전자책으로 읽는 양보다 종이책으로 읽는 양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방치될 동안 사운드는 이제 수명을 다했는지 가끔 혼자 꺼지고, 타임머신 마냥 특정 날로 초기화되며, 배터리도 쉽게 닳아버립니다. 아직 못 읽은 전자책들이 산더미인데... 이걸 어쩌나!

     저는 어쩌다가 이북 리더기와 멀어지게 된 것일까요?

괜한 감성 샷

Intro. 이북 리더기를 산 이유

     살 당시에도 느리다(진짜 느려요), 설탕 액정이다,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 등등의 단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어두침침한 취준생이었고, 무엇을 하든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비와 선택은 죄책감만을 불러올 뿐이었죠. 그런 제게 '책'이라는 모범적인 취미 생활을 하게 해주고, 나름 얼리어답터의 느낌도 주면서 언제 어디서든 자기계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기기는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샀습니다.


이북 리더기를 쓰지 않는 이유

첫 번째, 어쩔 수 없는 종이책 세대 사람입니다.

     종이책과 전자책 중 무엇이 더 나은지는 상대적으로 보아야합니다.(참고-종이책이 정말 우월할까요?, 심리학 저널 'Mind'). 다만 안타깝게도, 저는 뇌가 발달할 시기에 종이책만으로 공부한 종이책 세대입니다. 인터넷으로는 보통 짧은 기사나, 재밌는 인터넷 소설들을 읽었지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으로 나올 만큼의 분량인 텍스트들은 디지털 텍스트로 읽으려니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기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읽는 방식이 디지털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읽는 방식이 디지털이라는 것은 1) 페이지 간 자유자재로 이동이 어렵고 2) 읽은 것에 대한 보상을 느끼기 어려우며 3) 메모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전자책으로 책을 읽으면 페이지 간 이동이 어렵습니다. 긴 글을 읽다 보면 앞쪽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종이책은 대강의 위치를 눈으로 훑어가면 되지만, 전자책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키워들 검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키워드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을 때에는 더더욱 일일이 찾아야 합니다.

     2)종이책은 읽은 양에 대한 피드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름의 보상이 되는데 전자책은 그게 없습니다. 종이책을 손에 쥐며 읽을 때 느껴지는 종이의 두께는, 전자책 아래 자그맣게 보이는 '116/203'에 비해 강력합니다. 이때문에 종이책을 읽을 때 더 많은 보상을 느끼게 됩니다.

     3) 메모를 할 수 없다는 건 가장 불편한 점이었습니다. 크레마에 메모 기능이 있지만, 그런 식의 메모가 아니라 메모가 책의 일부처럼 느껴지길/보이길 원했습니다.(게다가 크레마로 메모를 하려고 시도하다간 인내심 한도를 다 써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책을 읽을 땐 보통 포스트잇에 메모를 하고 책에 붙입니다. 이북 리더기는 동그라미를 친다든가 밑줄을 두 개 친다든가 하는 자율성이 없습니다. 이런 제한적인 것들이 책을 주체적으로 읽지 못하게 만듭니다. 종이책은, 이 책에는 내가 뭔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도 됩니다. 이북 리더기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을 깊이 있게 읽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북 리더기를 쓰지 않는 이유

두 번째, '전자 기기'로서의 이북 리더기는 아직입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말조차 촌스러워진 이 시대에, 이북 리더기는 이걸 전자기기라고 해도 될는지, 싶을 정도의 스펙을 가졌습니다. 이북 리더기에 앱을 깔고 도서관을 가고 메모를 하고 아무튼 이리저리 만지고 있자면 이 기기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보살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정말 너무 느립니다. 너무 느립니다. 정말 너무나 느립니다. 제 기기가 구형이라 그런가 싶어 최신 기기의 리뷰들을 보았지만 아주 큰 변화는 없어 보입니다. 이조차 이북 리더기만의 감성으로 포용하고자 했으나, 저는 실패했습니다. 이 답답함 때문에 차라리 종이책을 보게 될 정도입니다. 주머니 안에서 마구잡이로 엉킨 이어폰 줄에도 화내지 않는 제게도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죠.

     애초에 전자 기기로 텍스트를 읽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굳이 이북 리더기를 살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전자책은 사되, 휴대폰이나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읽는 것이 (눈에는 안 좋으나) 정신 건강에 백만배는 더 좋을 것입니다.


이북 리더기를 쓰지 않는 이유

세 번째, 생각보다 저렴하지 않습니다.

     전자책은 종이책보다 저렴합니다. 나온 지 꽤 된 '사피엔스'를 예로 들면, Yes 24기준으로 종이책은 19800원, 전자책 구매는 12960원, 전자책 90일 대여는 7200원입니다. 종이책에 비해 40% 정도 저렴하게 살 수 있습니다. 보통의 책들이 20~3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 가능하며 여러 쿠폰이나 적립금을 부지런히 찾아 쓴다면 더 저렴하게도 살 수 있습니다. 이용하기 번거롭긴 하나, 무료로 사용 가능한 여러 전자 도서관도 있습니다. 또 요즘은 리디 셀렉트나 밀리의 서재 같은 전자책 구독 서비스라는 선택지도 있구요.

     하지만 생각보다 저렴하진 않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소비자로서(!) 초기 이북 리더기 비용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죠. 크레마 사운드는 당시에 10만 원 정도였고 새로 나온 '크레마 사운드 업'도 12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요즘 책을 생각하면 10권도 못 사는 가격이기는 하나, 이 가격까지 신중히 생각한다면 이북 리더기로 전자책을 즐기는 것이 그렇게나 저렴하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게다가 이 기기들의 내구성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몇 년에 걸쳐 새로 사야 한다면 더 큰 부담이 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차라리 휴대폰이나 컴퓨터나 태블릿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렴한 태블릿은 10만 원 이하로도 살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크레마보다 백만 배 더 빠를 것입니다.



Outro.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크레마

      크레마 사운드를 좋아했었습니다. 가볍고, 예뻤습니다. 한 손으로 휙휙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건 혁명이었으며 가벼운 책을 읽기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외출할 때 이것만 들고나가면 적어도 생산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었구요. 게다가 아직도 종이 잉크는 제게 마법과 같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요.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Wow'들은 그 불편에 비해 한없이 작은 것이었습니다. 단점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이젠 이북 리더기라는 환상에서 나오려고 합니다. 이북 리더기만 있으면 세상 모든 책을 다 읽을 것만 같았던, 장비빨만 세웠던 저를 반성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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