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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가벼운 회사원

나는 매일 포기한다

by 보나 Jan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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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1은 기본 생활습관을 잘 잡아야 한다는데 우리 딸은 아직 멀었어. 오늘도 토큰백을 학원에 놓고 왔더라? “


“우리 집에도 기본 습관 안 잡힌 분이 한 명 더 있는데~”


남편이 티 나게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나는 그 말에 살짝 가자미 눈을 하고 남편을 째려본다. 하지만 남편은 그 눈길에 익숙한 듯 초연하다. (--+ 찌릿)




첫째 아이는 뭘 잘 잊어먹고, 주변을 섬세히 챙기지는 못하지만, 대신 감각 하나는 끝내준다. 윗집에서 나는 작은 소리만 들어도 "엄마, 윗집에서 안마의자를 사용하나 봐." 할 정도로 예민하다. 문제는 인내심이 부족한 건데, 사실 그건 내가 준 유전자의 힘이다.


나 역시도 인내심이 많이 부족하다. 예전에 TCI 성격검사를 했을 때 인내심 항목에서 100점 만점에 9점이 나왔다. 수치로만 보면 인내심의 '인'자도 모를 정도로 인내심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없는 인내심도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한다.

수치는 비록 한 자릿수이지만 수치보다 내가 낼 수 있는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발휘해서 살아간다. 9점짜리 인내심을 끌어모아 90점처럼 보이게 하는 건 엄청난 에너지 과소비이다.

그러다 보니 쉽게 포기하게 된다.  마음속으로는 매일매일 포기 한다.


회사에서 누군가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속으로 '아 정말 못해먹겠네. 지금 퇴사하면 퇴직금 얼마 받지? 하며 퇴직금 계산기를 바로 돌려본다. 상사가 책임지기 어려운 프로젝트를 맡으라고 하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다. '나한테 이 일을 주면 당장 퇴사한다고 말할 거야'


출근길엔 더 심하다. '오늘은 기필코 회사 가서 휴직한다고 말할 거야' 하며 기분은 저기압으로, 표정은 어둡게 회사에 간다. 그러나 누군가 "오늘도 출근했네!" 라며 밝은 얼굴로 맞아주면, 속으로는 '내일 그만둬야겠다' 하며 또 하루를 버틴다.


나는 매일 포기한다. 출근 후 두 시간 만에 일을 포기하고, 점심시간쯤엔 인간관계도 포기하고, 오후에는 짬짬이 아이의 스케줄을 챙기다가 그냥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회사에는 계속 다닌다.


이렇게 포기하면서 살았는데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온 걸까?


다행스럽게도 부족한 인내심만큼 용기도 많이 부족해서다. 퇴사한다고 외치기에는 용기가 없고, 누군가가 "오늘 힘들었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다 알아요." 같은 말 한마디만 해주면 금방 기분이 풀리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종이 한 장 보다도 얇다. 이토록 가벼운 회사원이 또 있을까?



매일 마음속으로는 천 번도 더 회사를 그만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가벼운 마음이 회사를 13년 다닐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아이를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이를 거울삼아 내 인생을 돌아본다.


내가 딸에게 "인내심 좀 가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얼마나 참을성 있는 어른인가? 힘든 상황에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그런 인내심은 없다.


그러나 다행히 '다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마음'은 있다.

고통이 닥치면 '이것도 지나갈 거야' 하는 마음을 가진다. 마음이 복잡해질 때는 '일단, 가장 작은 일부터 해보자.'


커다란 프로젝트든, 작고 귀찮은 일이든, 일단 시작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 그게 다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금 힘든 일도, 짜증 나는 순간도, 웃고 있는 지금도 언젠가는 다 지나간다.

내일도 아마 또 포기하려 하겠지만, 그게 나다.


어쩌면, 이렇게 가볍고 부족한 모습이 나의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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