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여행은 기꺼이 고생을 사서하는 것
"다른 것 하지말고 여행을 가"
코끝이 앗쌀하게 차던 올해 초의 어느 겨울 날 까페에 앉아 주문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평소 그녀의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을 닮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에게 정확하면서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언니가 나에게 툭하고 던진 말이었다. 가볍게 던진 그 말에 내가 정확하게 맞았다. 그날부터 "여행"이란 단어가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여행을 왜 가야하지?' '여행을 어디로 가야하지?' '언제 얼마나 길게 갈 생각인데?' 질문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나씩 답을 찾다보니 이 여행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소망하던, 언젠가는 꼭 할 수 있길 바라던 그런 일이었다.
나는 왜 떠나려고 하는가?
24살, 혼자 작은 배낭을 메고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열차를 타고 한달간 여행을 했다. 그 여행을 끝으로 1년간의 미국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는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이 너무 대단하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겠다고. 여행은 나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행위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멘탈이 다 무너지고 나서야 멈추기로 했다. 끝이 정해져있는 이 쉼의 시간동안 단 한가지 꼭 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일 것이다. 그것도 일을 하면서는 쉽게 떠나기 힘든 장기여행.
20대의 여행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나에게 열살과 여섯살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겠지. 훌훌 혼자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데리고라도 가겠다 마음먹었다. 여행을 계획하고 서칭하면서 아이들과 여행하는 용감한 엄마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그게 나에게 용기가 되었다. '아이들이 어린데 너무 힘들진 않을지, 혹시 위험하진 않을지, 학교와 어린이집 일정은 어떻게 조정을 해야할지.' 나 혼자 떠나겠다고 생각할 때 보다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복잡한데다 그만큼 많은 반대에 부딪힐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지금이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긴 여행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함께 가기로 했다. 일단 한번 해보고나면 다음 기회를 또 노릴 수 있을지 모르나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겠지.
가장 먼저 남편이 이 여행을 반대했다. 아이들과 나를 멀리 보내두고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같이 가자며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결혼전에 세계여행을 하고싶다는 나를 멈춰세울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그 언제올지 모르는 '언젠가'를 기다리다가 11년이 흘렀다. (이번엔 안 속는다 요놈!) 남편의 반대는 설득하다가 또 어느때는 들은척 만척 무시했다가 마지막엔 "혼자 보내주든 같이 보내주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고 강수를 뒀다. 우연히 남이 던진 말에 여기까지 왔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씨앗이 단단했던지 누가 반대한다고 포기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분노는 나의 힘' 이라고 했던가. 오히려 더 찬찬히 구체적으로 여행을 계획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아이들이랑 장기여행? 너 혹시 어디 아프니?"
"넌 고생을 하고 한국에 남은 남편만 좋은일 아니니?"
"아이들이랑 배낭을 메고 가겠다고?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여행가겠다는 내 이야기에 대부분의 지인들 반응이 이랬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오래전부터 나에게 여행이란 사서 고생을 하는거였다. 기꺼이 고생하겠다 마음먹는 것. 그것이 나에겐 진짜 여행이었다.
남편의 반대와 여러 지인들의 의문에 답하면서 지금 내가 이 여행을 가야하는 이유가 점점 단단해졌다. 여행을 구체화 할수록 이상하게 용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