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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일팔 Dec 01. 2019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애원의 목소리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하여

아침에 출판사로 걸어가는데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익숙한(?) 민중가요가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무슨무슨 연맹이라고 적힌 봉고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 달린 확성기(보다 훨씬 큰 특수 확성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격정에 찬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감정이 극에 달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붉은 조끼를 입은 중년의 두 남성이 표정 없는 얼굴로 삶이 무료하다는 듯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과 확성기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톤이 너무 달라 신기했다. 

차는 우리 출판사가 거래하는 인쇄소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설마 그 인쇄소가 저 확성기의 목소리가 지목하는 체불임금의 원흉일까 의심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하등 쓸모없는 질문을 속으로 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나저나 하루 종일 저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면 우리 회사 편집자들이 싫어할 텐데 어쩌나, 역시 하등 쓸모없는 걱정을 하며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마침 통금 버스 안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내린 참이었는데, 버스 안에서 내가 읽은 대목은 계엄군이 막 광주 시내로 진입해 시민을 학살하고 연행해가는 대목이었다. 광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군은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민들에게 제발 도청 앞으로 나와 계엄군을 막아달라고 애원했고 시민들은 나오지 않았거나 나오지 못했다. 

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 속의 이야기와 전혀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속 빨간 조끼 입은 아저씨들의 집회를 등치시키며 내가 속한 세계가 어디인지 잠시 생각해봤다. 나는 출판노동자로서 저들의 시끌벅적한 집회의 절박함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산적한 회사 직원으로서 그들이 과하게 만들어내는 소음을 불편해 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이 갑작스러운 소음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생각했다.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다. 내 앞에는 얼마 전에 입사한 직원이 앉아 있는데 최근 그녀는 자신이 수행할 업무의 범위를 아직 몰라서 종종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표정이 더 안 좋았다. 내가 한 마디를 던지면 억지로라도 두 마디, 세 마디를 거들었던 그녀였다.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모니터에 떠 있는 작업 파일들을 가늠하며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 무심한 척 물었다. 곧 출간될 번역서의 저자가 얼마 뒤 한국에서 출간기념회를 갖는데, 해당 책의 편집자 요청으로 어제부터 이벤트 배너를 디자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며칠 전에 해당 행사 계획을 알고 있던 나는 그 행사 준비에 필요한 이미지 배너나 페이지 이미지 파일을 작업하는 일에 그녀가 동원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마침 내가 없는 사이에 그 업무가 전달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소속조차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채 입사했는데 업무분장 역시 명확하지 않아서 아무도 그녀의 업무를 통제하거나 조율해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타 부서의 편집자가 아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 자신이 속한 팀의 팀장에게 업무를 보고하고 해당 업무의 이관에 대해 대상 부서의 팀장에게 전달된 뒤 해당 팀장에 의해 업무가 최종적으로 인수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실무자끼리 다이렉트로 일이 전달된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그런 상황을 우려했지만 나는 그녀의 팀장도 아니었고 중간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그냥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갑작스러운 업무 의뢰를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배너를 제작해, 역시 상부로부터의 아무런 턴펌도 받지 못하고 해당 편집자에게 자신의 작업물을 전달했다. 사달은 그 후에 일어났다. 즉 제작물을 전달한 오후를 지나 그녀는 퇴근했고, 그 결과물을 받은 편집자는 이미지의 퀄리티가 너무 낮다며 퇴근을 한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보내 다시 작업을 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무례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무례하다. 나는 퇴근 후 동료에게 업무에 관한 일로 연락을 하는 것이, 심지어 카톡을 날리는 것조차 무례하다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8시간이라는 약속된 시간 이후에 일어나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며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을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업무라는 것이 잘못된 경로로 무작정 건너온 일이라면 그 무례를 당한 자의 입장은 더욱 난처하고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편집자를 욕할 수가 없었다. 대놓고 가서 따질 수도 없었다. 나 역시 그런 무례함을 수없이 범했고 내가 그 무례함의 피해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무례함을 당해도 괜찮다고,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겨왔으므로. 

나는 노동의 문제에서 결국 궁극적인 문제는 피고용자와 사용자의 갈등, 개인과 회사의 갈등, 노동자와 자본의 갈등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악의 기원은 자본이며, 그것의 축적을 위해 노동자의 노동력이 과다하게 희생된다고 생각했다. 사용자가 자신의 탐욕을 거두면 노동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내 앞자리에 앉은 직원 굳은 표정을 보며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스펙트럼이 생각보다 훨씬 넓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동료가 동료에게 가하는 압력,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이나마) 상대를 증오하는 감정, 누적된 악감정이 개인의 삶과 노동자의 업무환경에 미치는 영향력.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필 사무실 안에는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또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의 격렬한 외침이 기계음을 타고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밀린 임금 지급하라! 지급하라! 지급하라!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불과 몇미터 바깥의 세계였지만 그 세계는 (아직까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고, 당분간은 겪고 싶지 않은 세계였다. 우리 회사의 편집자들은 소음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내 앞자리에 앉은 신입사원에게 일을 맡긴 편집자는 늘 일손이 부족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사장과 실장은 경찰에 민원을 넣었다. 얼마 뒤 도착한 경찰들 덕분인지 오후부터는 확성기에서 쏟아져나오는 소음이 잦아들어 마치 늦여름 힘빠진 매미의 울음소리 같은 중얼거림이 사무실 안을 둥둥 떠다녔다. 나는 모니터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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