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파라버스(Paraverse)의 근대
예언처럼 들리는 이 말을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으로 썼다. 안나 카레리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온갖 충격적 사건을 겪고 난 후에야 비극을 끝맺는다. 현대의 소설과 영화의 소재는 대부분 비극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라고 미학적으로 정의했다.
‘코미디도 있고 로맨스도 있고 해피엔딩인 작품도 많잖아요’라며 항변할 수도 있겠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명작들을 찾아보기 바란다. 비극이 아닌 작품이 몇 작품이나 있는지. 거의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노벨문학상의 명작의 절대기준은 아니지만 아무튼 명작 중에 해피엔딩은 거의없다. (개인적으로 꼽는다면 그리스인 조르바 정도?) 왜 디즈니 식 해피엔딩 작품은 명작이 되기 어려울까? 해피엔딩은 삶의 비극적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리퀸, 하이틴 로맨스, 디즈니나 할리우드가 보여주는 해피엔딩은 모두 허상이며 조작과 다르지 않다.
가끔 이런 토론이 벌어지면 많은 이들이 “인간은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데 왜 인생의 본질이 비극이고 해피엔딩이 조작이냐”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당연히 운명(運命)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움직일 運자를 쓴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다. 그래서 평소의 준비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운명의 돌은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다. 피할 길이 없다. 따라서 숙명은 바뀌지 않는다. 별자리 宿자를 쓰는 이유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정한 것이다.
이 시대의 가정은 왜 불행해지는 것일까?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작품으로 보여주었듯 불평등에서 기원한 삶의 고통 때문이다. 생존의 고통이라는 숙명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인간의 사명이다. 인간의 소유욕이 최고조에 이른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난 것은 모든 인간이 물려받은 숙명이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정해진 숙명 속에서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라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순응하든지 반항하든지.
문제는 세계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는 20세기 초처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양분되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사장으로 단순화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한 노동자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늘날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된 노동계급은 정규직, 비정규직, 자영업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된다.
지상 가족, 반지하 가족과 지하 가족의 세계 사이에는 각각 선이 있다. 이들은 선을 넘지 않는다. 선을 넘지 않기에 이 구분된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평평한 것처럼 보인다. 지평이란 무엇인가? 인식의 범위다. 인식하지 않으면 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익은 반지하에 사는 기태의 삶을 알려고 하지 않기에 그에게 반지하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동익은 기택의 ‘반지하 냄새’를 통해 다른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낀다. 냄새가 거슬리지만 한 번도 반지하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니다. 반지하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타인을 잘 믿고 잘 속는 것은 착해서가 아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구김살이 없고 부족함을 모르기에 타인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을 뿐이다. 그들은 반지하 냄새, 지하철 냄새를 자신과의 경계로 생각할 뿐, 그 경계 너머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창밖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던 반지하 가족에 비해 지하 가족은 아예 희망이 없다. 그들은 지하세계에서 연명하며 정신적으로 절망하고 퇴행한다. (지하실에 숨어 살던 근세가 젖병으로 우유를 마시는 모습은 이들의 정서적 퇴행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이 무기력함과 퇴행은 지하에서의 삶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위기감을 만나자 극단으로 폭주하게 된다.
<기생충>에서 가장인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문화자본도 축적해왔다. 투포환 선수 출신의 엄마, 사수생인 아들, 미대 재수 중인 딸, 이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제법 화목하게 살았지만, 기택의 대만 카스텔라 사업 몰락으로 반지하로 오게 된다. 반지하는 참 희한한 주택 구조다. 지상보다는 낮지만, 지하보다는 높다. 지하는 어둠이지만 반지하는 창문 틈으로 지상 세계를 엿볼 수 있기에 덜 절망적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반지하란 희망 고문의 건축적 구현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아들 기우(최우식)의 기지로 글로벌 IT기업 사장인 동익(이선균)의 주택에 모두 취직하게 된다. 그들이 집을 비운 날은 마치 그 집의 주인이 된듯한 기분도 느끼고 희망도 품어보지만 꿈은 잠시였다.
우연한 계기로 동익의 집 지하벙커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빨려 들어간다. 지하세계와 반지하세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어떤 이들에겐 장맛비가 맑은 하늘 아래 파티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고, 어떤 이들에겐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재앙이다. 지상세계에서 파티가 있는 날, 지하에서 올라온 근세의 칼부림, 그 와중에 드러나는 반지하 세계의 비밀, 지상세계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근세의 등장에 충격받고 아우성치며 도망간다. “도대체 저게 어디서 나왔어?”
나란히 존재하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선을 넘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 듯 외면함으로써 유지되던 <멀티버스>의 세계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지상, 반지하, 지하 세계가, 나란히 중첩되는 파라버스(paraverse)가 형성되자 양극단의 투쟁이 아니라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난다. 비극적 본질을 감추고 있던 허상의 세계는 균열되고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루소는 가난(=악)의 분화를 만든 불평등은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귀족들의 사치와 타락을 질타했다. 그 대가로 컸다. 루소는 죽는 날까지 왕족과 귀족들은 물론, 볼테르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비난과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숙명에 반항하는 것은 물론, 순응하더라도 우리 삶은 비극일 수 있다. 자신의 비극적 삶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역사와 미래를 믿었다. 루소는 성공적인 인간의 업적은 “불명의 칙령”속에 기록된다는 사실을 믿었고 살아생전에 진리를 추구하는 자,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옹호하고 격려했다. 루소의 삶이 비극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멸로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비극 문학작품들이 위대하게 살아남은 것처럼.
봉준호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근대를 <기생충>을 통해 현미경으로 보듯 너무나 세밀하게 보여준다. 누군가는 공감으로, 누군가는 불편함으로 이 영화를 본다. 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비평이 난무하는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문명에 대한 희망이 넘쳐나던 르네상스 말기에 근대 문명의 불평등과 야만성을 질타했던 루소의 외침이, 21세기의 현실에, 우리의 일상에, 혹은 영화 <기생충>에 그대로 적용해도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했음을 숨길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