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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Feb 14. 2021

거리, 사람들

테헤란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역삼역 사거리는 오가는 직장인들로 언제나 붐빈다. 사무실이 근처에 있는 나 역시 그중에 한 명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동료들과 산책을 하곤 했는데, 강남역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테헤란로 표지석을 마주치게 된다.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볼 때마다 내가 참 출세했다는 생각을 한다. 촌놈이 서울, 그것도 테헤란로의 중심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


산책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어김없이 마주치는 이가 있다. 아니 있었다고 해야겠다. 때가 잔뜩 묻은 얇은 외투를 걸치고 역시 시커멓게 변한 언젠가는 하얀 운동화였을 신발을 신은 아저씨. 그 아저씨의 손에는 늘 기다란 자루가 달린 싸리비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는 틈만 나면 그 싸리비로 여기저기를 청소하셨다.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을 탓하기라도 하듯 뭐라 중얼거리면서 구석구석 청소를 하셨다.


아저씨는 역삼역 5번 출구와 6번 출구 사이에 늘 앉아 계셨다. 높게 쌓아 놓은 화단에 걸터앉아 빵과 우유를 드실 때도 있었고 가끔 소주를 종이컵에 한가득 따라 드실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그 위치에 안보이셔서 두리번거렸더니, 건너편 거리를 청소하고 계시기도 했다. 아저씨의 행색으로 보아 공무원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언제 마지막으로 세수를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는 때가 그득했다. 공무원은 아니지만 아저씨는 거리를 청소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 과제인 듯 진지하게 청소를 하셨다. 역삼역 주위 청소는 혼자서 다 책임을 지고 계셨다.


그러던 아저씨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지만 궁금해졌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화단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리를 떠 돌다 어디 다른 곳으로 가셨나 싶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그 화단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저씨였다. 조금은 반가운 마음에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원래의 아저씨와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비슷한 행색에 자루가 긴 싸리비를 들고 있었지만 얼굴 생김이 달랐다. 이마도 훨씬 많이 벗겨져 있는 것이, 전의 그 아저씨가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 발생한 걸까. 지금 있는 아저씨는 분명 전의 그 아저씨가 아닌데. 행색도 비슷하고 저 빗자루도 원래의 아저씨가 쓰던 그 빗자루가 맞는 것 같은데, 사람이 바뀌었다. 며칠 뒤 처음의 아저씨를 역삼역 인근에서 몇 번 봤다는 목격담을 동료로부터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예 자취를 감추셨다. 자리 경쟁에서 밀려난 듯 보였다. 넘버원으로 활약하다 순식간에 넘버투로 밀려나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을 수도 있겠다.


새로 넘버원이 된 아저씨는 넘버투 아저씨보다는 덜 성실하시다. 빗자루를 늘 들고 다니기는 했지만 한 번도 거리를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볕이 좋은 날이면 화단에 기대어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고는 하셨다. 종종 음식을 드시기도 하고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셨다. 넘버투 아저씨가 그랬듯 넘버원 아저씨가 마시는 소주도 어디선가 남은 소주를 얻어온 것 같았다.


대학 다닐 때에 '이사도라'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캠퍼스를 이십사 시간 돌아다닌다고 해서 이사도라라고 불렀는데 정말 그 아이는 여기저기 안 다니는 곳이 없었다.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부모가 돌봐줄 여력이 안돼 어릴 때부터 밖으로만 다녔다고 들었다. 이사도라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이들한테 말을 걸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아리방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가끔 술 마시고 있을 때 나타나서는 안주를 몇 개 집어 먹고 음료수를 한잔 받아 들고 잠시 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다른 곳으로 탐방을 떠나곤 했다. 갑자기 말을 걸거나 졸졸 따라오며 이상한 질문을 해 대서 놀랄 때가 있긴 했지만 사람들한테 해를 입힌 적은 없다. 길을 걷다 이사도라를 만나면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한 번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데 이사도라가 나타났다. 이 학생 저 학생한테 말을 걸다가 퇴짜를 맞고는 결국 나에게 다가왔다. 겨울이었는데 얇은 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형, 배고파요. 춥고 배고픈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다음 강의에 늦지 않게 가기 위해, 나는 주섬주섬 천 원짜리를 꺼내어 백반 식권을 하나 사 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렇게 몇 년을 캠퍼스 곳곳에 출몰하던 이사도라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 아이의 부모가 더 이상 밖에 못 나가게 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말도, 근처의 다른 대학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 뒤로 다시 보지 못했다.


코로나로 강제 재택을 하느라 역삼역 사거리에서 넘버원 아저씨를 본지 한참이다. 어느새 입춘도 지나고 추위도 한풀 꺾였다. 넘버원 아저씨와 넘버투 아저씨는 거리에서 이번 겨울을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다. 무료 급식소 같은 곳을 평소에 가셨었는지는 모르지만, 근래 들어 코로나로 인해 급식소 운영도 여의치 않았다고 하는데 최소한의 끼니는 챙기셨기를 바란다.


어제 뉴스를 보다 울고 말았다. 성남에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시는 김하종 신부님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탈리아에서 온 천사 같은 신부님의 모습에 감명을 받기도 했고, 하루에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도시락을 타기 위해 줄을 선다는 뉴스, 줄을 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도시락으로 하루를 버틴다는 소식,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성남까지 가서 하루 한 끼를 해결해야만 하는 노인의 모습에 그냥 눈물이 흘렀다.


내 월급에서 세금을 더 빼가도 좋으니 기본소득이던, 복지제도의 확충이던, 가능한 한 빨리 실현이 되었으면 좋겠다. 햇볕 좋은 날 넘버원, 넘버투 아저씨가 남이 먹다 버린 것이 아닌 온전한 소주 한 병을 사 마실 수 있도록. 노인들이 하루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서울 북쪽 끝에서 성남까지 긴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이제는 40대가 되었을 이사도라가 따뜻한 옷을 입고 마음껏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다닐 수 있도록.




*Cover image by Ben Kerchx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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