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잘 마셔요?"
면접관의 질문에 순간 얼어붙었다. 잘 마신다고 하면 술꾼으로 오해할 것이고, 못 마신다 하면 사회성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짧은 침묵끝에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린 뒤에 입을 열었다. 저는...
첫 직장을 일 년 만에 그만두고 두 번째 회사에 지원했다. 경력이 아닌 신입 채용에 지원했다. 일 년밖에 안 되는 짧은 경력을 내세울 수도 없었고,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이어서 그랬다. 게다가 일 년도 안되어 이직을 하려는 사람을 좋아할 리 없다고 판단해서 경력을 숨겼다. 그전 두 곳의 회사에 경력을 써넣은 채 신입 채용에 지원했다가 연달아 서류전형에서 탈락한 뒤였다. 서류전형 및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드디어 면접을 보는 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다섯 명의 면접관이 있었고 나는 그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면접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한 면접관이 물었다.
"주량은 어떻게 되나요? 술 잘 마시나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잘 마신다고 하면 일은 안 하고 술만 마신다고 오해할까 걱정이었고, 못 마신다고 답하면 그것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았다. 머리를 최대한 빠르게 굴린 후 답을 했다.
"소주 한 병에서 두 병 정도 마시는데, 분위기에 따라 더 마시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잘 마시는 쪽으로 베팅하는 것이 이로울 것 같았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면접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회사는 술, 훌라 (카드게임), 골프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는 회사입니다."
놀랍게도 이 회사는 그때 한국에는 자리잡지 않은 주 5일제를 도입하는 등 앞서 나가는 문화를 가지고 있던 미국계 IT기업이었다. 술을 잘 마셔야 성공할 수 있다니... 기가 막혔지만 이직이 급했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면접장을 나섰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중고신입으로 입사했다.
입사후 11년 동안 다양한 업루를 경험했다. 영업을 할 기회도 있었는데, 내가 맡았던 고객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문화의 대기업이었다. 큰 계약을 앞두고 고객과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며칠 전 고객이 날짜를 조정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된다고 했고, 고객은 본인팀 전체 회식하는 날로 잡자고 했다. 속으로 욕이 치밀었지만, 나는 이미 너무 좋다고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약속날, 노량진 수산시장의 큰 횟집에 30명 정도 되는 고객 팀원들이 일렬로 늘어선 좌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이 놓이자 부서장이 일어나 말했다.
"각자 앞에 있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세요."
그는 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소주 원샷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부서장은 선채로 한 명 한 명 노려보며 잔을 다 비우는지 확인했다. 여직원, 남직원, 우리 회사 영업사원들까지 모두가 잔을 비울 때까지 차례로 쏘아보며 무서운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구를 무찌르러 나가기 전의 눈빛 같았다. 파도타기가 끝나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술을 억지로 먹이는 풍경은 한국의 술자리에서 낯설지 않다. 조금만 마시거나 안 마시겠다고 하면 죄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술을 못 마시면 사회생활 못하는 반 사회적 인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술도 안 먹고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냐며 타박이 이어진다. 술에 취해서 하는 실수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술자리에서 온갖 행패를 부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술 취하면 원래 실수도 하는 거라며 넘어간다.
술을 끊었다고 하면 바로 이어지는 질문이 한약 먹고 있냐 는 것이다. 아니라고 하면 그런데 왜 끊었냐며 어리둥절해한다. 무슨 재미로 사냐며 힐난한다. 역시 비정상인 취급을 한다. 몸에 안 좋은 것을 끊었다고 하면 보통 잘했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인데, 몸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술을 끊으면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술을 마시면 사람이 좀 이완이 되고, 다 괜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평소 미워했던 사람도 술기운이 불콰하게 올라오면 예뻐 보인다. 속 깊은 얘기를 꺼내 놓기도 하고, 마음에 없던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친한 척하며 어깨동무도 하고 말도 놓고 그렇게 그 밤을 즐긴다. 만취상태에서 헤어지고 아침에 다시 만나면 모든 게 리셋이다. 술 먹기 전의 어색함 그대로 돌아간다. 간밤에 했던 말과 행동이 생각나 이불킥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기는 했다. 술을 덜 마시거나 안 마시려는 사람들도 많고, 회식에서 술을 강요하는 문화도 많이 없어졌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 이렇게 얘기하면 노인네 인증이지만 - 남자들이 저녁에 카페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풍경도 이제는 자연스럽다.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맥북을 열었다. 금요일 밤, 옆 상가에서는 불금을 외치며 술자리가 한창이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냉장고를 열고, 쟁여둔 IPA 한 캔을 꺼낸다. 유리잔에 따르자 거품이 부드럽게 올라온다. 참지 못하고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하고 향기롭다. 그래, 이 맛이지.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편한 사람들과 좋아하는 종류의 술을 적당히 마시는 건 언제든 좋다. 하지만 누군가가 강요하거나, 주량이 사회성의 척도가 되는 건 불편하다. 맥주가 식기 전에 얼른 마무리하고 넷플리스를 봐야겠다. 잔을 내려놓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어본다.
*cover image by Pavel Danilyuk | pexel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