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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Jun 01. 2021

발레, 불혹의 남자를 흔들다

[프롤로그]

마흔에 <백조의 호수>를 봤다. 처음 보는 발레 공연이 낯설었지만 차츰 집중됐다. 궁전에서 호수로 무대가 바뀌며 종종 들어본 '정경'이 연주된다. 백조의 애처로운 마음이 현을 타며 흘렀다. 오데트의 날갯짓이 더해지자 화음을 이룬다. 무곡은 춤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완성됨을 알았다. 음악만 들었을 때 느끼지 못한 감명에 소름이 돋았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 발레가 하고 싶었다. '이 나이에?', '그렇게 적나라한 무용복을?' 상상만 했을 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린다. 꿈틀대는 욕망이 남사스러워 사그러트렸다. 차라리 또래도 많이 한다는 라틴댄스가 어떻겠냐고 타협안을 냈다. 하지만 마음은 생각과 달랐다. 발레리노들이 자꾸 떠올랐다. 헌데 걸리는 게 또 있다.


성악은 어쩌지?


2012년말 번아웃 직전 회사를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다. 한 달 여 신나게 걸었다. 귀국 전 스페인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있냐며 마드리드의 플라멩코 바에 갔다. 와인을 홀짝이는데 무용수로 보이는 중년여성이 나왔다. 입은 옷 너머 뱃살이 두둑했다. 조금 실망했지만 그녀가 발구름을 시작하자 종교 의식이라도 시작한 듯 순식간에 엄숙해졌다.


독특한 기타 연주 속에 신음같은 기합, 박수와 발구름이 주고받는 격정적인 리듬, 그 위로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과 상체 동작을 보면서 무대에 빨려 들었다. 춤추는 분위기가 이렇게 무겁다니 신기했다. 춤이라면 스트릿 댄스처럼 신날 줄만 알았는데, 플라멩코를 보며 뭔가 다른 눈이 떠졌다. 돌아오자마자 1년 넘게 배웠다. 재미있었는데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클래스가 빠지며 멀어졌다.


그 시간 대 다른 게 뭐 없나 찾다가 '성악 클래스'를 보았다. 뮤지컬을 좋아해 멋진 아리아를 따라 부르고 싶었지만 절망스럽게도 음치다. 술에 어지간히 취하지 않는 이상 노래방도 피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르는 것만큼 벌벌 떨리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에 나오는 '지금 이 순간'을 꼭 부르고 싶었다. 보컬 수업과 뮤지컬 발성반에 다녔지만 나아질 기미는 없었다.


성악 클래스를 등록했다. 이번에도 음치탈출 못하면 노래 부르길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다. 발성부터 보컬수업과 달랐다. 타고 난 소리라는 선생님의 격려 한 마디에 자신감이 붙었다. 신나는 트롯을 불러도 슬퍼져 마이크를 뺏기던 기억은 안녕이다. 그러다 보니 성악의 모태인 오페라에 관심이 갔다. 처음 본 게 푸치니의 <라보엠>, 딱 하나 아는 곡 '그대의 찬 손'이 작품 속에서 나올 땐 짜릿했다.


베르디 작품을 찾아보고 파바로티나 도밍고 등 유명한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었다. 오페라와 서양음악 해설집도 들여다보니 클래식 음악에까지 흥미가 미친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 유명한 작곡가의 대표 교향곡들을 듣다보니 차이콥스키에 관심이 안갈 수가 있나.


2019년 공연한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포스터 따라 그리기


다시 백조의 호수


춤추는 걸 좋아했던 시절이 생각났다. 하늘도 찌를 정도로 바짝 세운 머리카락, 걷기 귀찮을만큼 통이 크지만 뽀대나는 청바지 '마르떼 프랑소와 저버'와 옐로우 '미찌코 런던' 박스티를 입고, 조명에 반짝거릴 링 귀걸이까지 하고 집을 나서면 심장이 먼저 흥을 탄다. 고등학생인 내가 가면 안되는 곳이지만 맘껏 춤출 수 있는 나이트에 가는 건 축제였다.


명동의 '마이하우스'는 주말이면 춤꾼들이 모인다. 뽐내기에 은근한 신경전이 벌이지는데 그마저 즐겁다. 휘황찬란한 사이키 조명과 빵빵한 스피커에서 바비 브라운의 Humpin' Around, 밀리 바닐리의 Keep on running 등이 터지면 정신을 못차리고 춤에 취했다.


집에서 친구들과 유행에 빠른 나이트 DJ나 MC해머같은 유명한 미국가수가 췄던 춤을, 주한미군방송 AFKN의 '소울트레인'에 나온 댄서들을 보며, '어떻게 추면 더 멋있을까?' 고민했다. 학교 축제같은 장기자랑을 할 때면 단상에 올라 춤을 뽐냈다. 그때만은 내가 주인공이었다.


덕분일까. '서태지와 아이들' 첫 콘서트 백댄서 오디션에 친구가 대신 신청해 얼떨결에 참가했다. 정동 MBC에 도착하니 겉보기에도 잘 출 거 같은 춤꾼들이 많았다. 준비는 따로 하지 않고 좋아하는 음악이 들은 테이프 하나 제출했다. '쿨'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뭘 몰랐다. 장기자랑하듯 췄는데 첫 라운드를 통과했다. 어깨가 으쓱했지만 다음 경연에서 바로 떨어졌다.


부상으로 콘서트 티켓을 받았다. 지금은 감지덕지 소중한 선물이지만 귀찮아서 남 줘버렸다. 춤추는 것 말고 아무 의욕이 없었다. 무얼 해야겠다는 목표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댄서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뿐 무기력하게 포기해버렸다.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고작 스무살에.


좋아하는 걸 스스로 포기했던 그때의 나를 후회한다. 누가 막지도 않았는데 하고 싶은 걸 억누르니 밀실에 갇힌 듯 답답하다. 사십에 이르러 다시 춤에 대한 열망에 흔들린다. 이제야 마음의 울림에 솔직할 용기가 생긴 걸 수도 있겠다. 확실한 건 60대에도 지금의 나를 보며 후회할 수는 없다는 것!


욕망을 쫓기로 했다. 불혹에 발레를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는 만만치 않았다. 근력은 딸리고 몸은 뻣뻣했다. 할수록 힘들다. 클래스를 마치면 동작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수업 후엔 레슨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배웠던 동작과 선생님에게 지적받은 내용 위주로 썼다. 기록을 남기는 게 목적이었는데 카페에서 발레음악을 들으며 노트하거나, 폰 메모장에 기록하는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춤을 글로만 이해하는 건 역시 무리다.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일하며 틈틈이 성악을 배우고(작년부터 코로나 때문에 쉬고 있네요), 공연 관람하고, 발레까지 하니 시간이 부족했지만, 레슨 노트에 꼭 그림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에 결국 미술학원까지 등록했다. 글 쓰면서 어려워하던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땐 기뻐서 미술 선생님에게 카톡을 보내 자랑까지 했다. 발레를 시작한지 6년차, 대학노트로 4권째를 쓰고 있다. 선생님들이 꼼꼼하게 알려주신 내용을 남기고 싶다.


발레 레슨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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