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주문하려는 고객에게 어떤 와인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물어봤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이 있다. 바로 ‘드라이한 와인’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늘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디저트가 아닌 이상 식사와 함께 마시는 와인은 당연히 스위트 와인이 아닌 드라이한 와인이어야 하고, 드라이한 와인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와인과 관련된 말 중 ‘드라이하다’는 꽤 많이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모호한 용어다. 달지 않은 와인 중에도 입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이라든지 과실 향이나 초콜릿 향으로 인해 달콤하게 느껴지는 와인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와인 속 당분 함량이 적다고 해도 와인이 주는 여러 향과 맛 때문에 어떤 와인은 드라이하게, 어떤 와인은 상대적으로 덜 드라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드라이한 와인을 좋아하면 와인을 좀 아는 사람, 달콤한 와인을 좋아하면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보는 풍조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와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드라이한 와인과 스위트한 와인은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묵직하면서 선 굵은 풍미를 보여 주는 프랑스 보르도 레드 와인이 원래는 ‘클라레’란 투명하고 맑은 스타일의 로제 와인에 가까운 레드 와인으로 먼저 명성을 떨쳤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와인의 종주국은 자타 공인 프랑스일지 몰라도 와인의 최대 소비국은 영국이었고, 와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와인의 다양성에 있어 영국인들이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주정 강화 와인을 키워 냈다는 사실이다.
포르투갈의 포트와인은 대표적인 주정 강화 와인이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와인의 산화를 막기 위해 다 만든 와인에 주정인 브랜디를 섞어 파는 경우가 있었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면서 보존력이 향상되는 원리다. 이미 완성된 드라이한 와인에 브랜디를 섞는 것과 달리 포트와인은 숙성 과정에서 브랜디를 넣어 와인의 맛이 달콤한 것이 특징이다. 발효가 중단되면서 미처 다 발효되지 않은 당분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지방의 독특한 와인에 불과했던 포트와인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 놓은 건 영국인들이었다.
영국인들은 중세부터 프랑스에서 많은 양의 와인을 수입해 왔다. 17세기 말 프랑스와의 정치적 불화로 인해 영국 정부는 프랑스 와인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어마어마한 관세를 부과하게 된다. 이에 와인 수입으로 먹고살던 영국 상인들은 살길을 찾아야 했는데 포르투갈이 새로운 시장으로 낙점됐다. 그동안은 달지 않고 맑은 프랑스산 클라레가 영국 상류사회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묵직하고 색깔이 짙으면서 달콤한 맛을 내는 포트와인이 어느새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신대륙에서 설탕이나 코코아 등 강한 단맛을 내는 기호품들이 인기를 끌면서 달콤한 술에 대한 수요가 커진 것도 한몫했다. 1717~1777년 영국으로 수입된 와인 중 3분의2가 포르투갈 와인이었다. 어마어마한 수출량 덕에 포르투갈 와인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입맛이 변해버린 것이다.
1800년대 중반 영국인들이 독하고 진한 와인 대신 가벼운 와인을 다시 찾게 되면서 스페인의 주정 강화 와인인 셰리와인이 포트와인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 셰리와인은 포트와인보다 가벼우면서 적당한 산미와 독특한 산화취, 오크 숙성 방식에 따라 다양한 아로마를 내는 게 특징인 주정 강화 와인이다. 셰리주가 영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자 몇몇 상인들은 새로운 나라와 지역에서 셰리주와 비슷한 주정 강화 와인을 찾기 시작한다. 1700년 중후반부터 영국인 상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와인, 시칠리아의 마르살라와인이 이때 주목받았고, 그 유산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영국인이 사랑했던 주정 강화 와인은 영국인이 사랑하는 위스키와 불가분의 관계다. 위스키를 숙성시킬 때 대개 주정 강화 와인을 숙성한 오크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주정 강화 와인은 와인의 아류나 디저트 와인으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엄연히 고유의 맛과 향을 갖고 있는 주체다. 위스키를 마시긴 너무 독하고, 와인을 한 병 다 비우자니 부담스럽다면 주정 강화 와인이 훌륭한 대안이다. 와인보다 강렬하고 위스키보다 온화하다. 단점이라 치부되는 달콤함도 와인 특유의 산미와 견과류를 연상케 하는 산화취가 균형 있게 어우러지면 고혹적인 매력으로 변모한다. 적어도 와인에 있어 달콤한 건 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