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관 관람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 동시상영관은 곧 짜장면 곱빼기와 같은 행복한 포만감을 준다. 6ㆍ7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가이던 옥수동, 금호동 지역에는 동시상영관이 두 곳 있었다. 재래시장인 금남시장에서 응봉동 방향으로 한 블록 위 사거리에 위치한 현대극장과 금호동 로터리(신금호역) 가는 길에 있는 금호극장. 이들은 일명 '현장'과 '금장'으로 불렸다. (금장은 배우 신영균이 지었다.)
두 극장은 불과 400~500m를 거리에 두고 인접했기 때문에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이 극장들은 관객 유치 경쟁 때문에 비교적 관객 입맛에 맞는 영화를 상영하는 데 신경을 썼다. 40 수년 전으로 필름을 감아본다.
누나와 함께 한 첫 극장구경
요즘도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를 보러 간다는 표현 중에 '극장 구경 가자'란 말을 자주 쓴다. 직역하면 영화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보러 가자는 의미인데 참 재미난 표현이다. 아무튼 나의 첫 극장구경은 둘째 누나와 함께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하는 첫 극장 나들이에서 본 영화는 공포영화였다.
현장과 금장 위치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나는 누나의 손아귀를 벗어나 스크린 앞을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누나는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애국을 실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날 이후 누나는 더는 나를 극장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한편 나의 첫 극장 구경 공식영화를 공포영화로 기억하는 이유는 관람 도중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누나가 번번이 내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또 주인공 여인이 목욕하는 뒷모습에서 나의 눈을 가린 것을 보면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나 보다. 지금도 시퍼런 달빛 아래 물을 끼얹던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질 정도니 소위 문화적 충격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곳이 바로 '현장'이었다.
본격적인 '때권시대'를 향유하다
금호극장
중학교에 들어가자 다양한 문화적, 생리적 호기심이 까까머리를 조신하게 놔두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금장' 앞을 지나야 했다. 당연히 매일 '프로'를 확인할 수 있었고 재미난 영화가 상영되는 날은 '때권' 구입을 위해 담배 가게 등을 기웃거렸다.
'때권'은 '초대권'을 말하는 은어로 당시 극장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는 직원이 게시장소를 제공한 가게 주인에게 두어 장씩 공짜로 주었다. 그러면 가게 주인은 우리 같은 까까머리 학생들에게 100원 내지 150원씩 받고 팔았다. 80년대 초반 당시 '현장'과 '금장'의 관람료는 500원이었다.
가끔 아버지가 가게를 하는 친구가 때권을 가지고 오면 공짜 구경하는 횡재를 누렸다. 물론 때권을 파는 가게 주인은 영화 내용과 관계없이 아무에게나 팔았고 영화관 역시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에 대해서도 무척 관대(?)했다.
'비 내리는 스크린'은 아무나 하나?
투표소로 활용된 금호극장
싸구려 동시상영관답게 시설은 형편없었다. 좌석은 합판이 보일 정도로 비닐커버가 너덜거렸고 관내 흡연이 가능했기 때문에 공기가 탁한 것은 물론 전방은 언제나 희뿌옇게 보였다. 시멘트로 만든 검열관석이 존재했을 정도니 상당히 오래된 극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필름이 끊기지 않고 돌아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스크린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어대며 야유를 해댔다. 개봉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야! 필름 빨리 안 감아!"
"돈 내놔! 환불해라!"
물론 육두문자가 듬뿍 섞인 외침도 곳곳에서 들린다. 그러나 그들이 야유하는 속내는 '제발 빨리 다시 보여주세요'라는 의미인 것을 왜 모를까. 씩씩거리던 관객도 필름이 다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영화에 몰두한다.
당시 영화는 이소룡이 나오는 무술영화 또는 권법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괜히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친구들끼리 권법대결을 한판 펼치는 것은 물론이다.
요즘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당시 만해도 좌판을 목에 걸고 객석을 누비며 껌이며 과자부스러기를 팔러 다니는 판매원이 있었다.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면 관중석을 누비는 판매원 모습에서 옛날 그들의 모습이 겹친다.
동시상영에 심야극장까지…
세월이 흘러 도심에 개봉관이 늘고 영화를 즐기는 인구가 늘면서 동시상영관이 다소 위기를 맞는다. 이때 동시상영관이 과감히 돌파구를 찾은 것이 바로 심야극장이다. 새벽녘까지 필름을 돌림으로써 필름 회전율을 높인다는 계산이었다. 때문에 한번 보고 나가야 하는 개봉관과 달리 동시상영관에는 조조부터 심야까지 죽치고 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백수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심야극장이 끝난 이후 방범상 문제가 많아지면서 이 또한 여의치 않게 되자 경영난을 겪게 된 동시상영관은 급격한 쇠퇴기를 맞게 된다.
할리우드 키드가 꿈을 키운 곳
동시상영관 '현장'과 '금장'은 문화 소외지역인 옥수동, 금호동 지역에서 수십 년간 남녀노소에게 문화욕구를 해소시켜 준 명물이었다. 어느 까까머리 학생에게는 할리우드 키드의 꿈을 심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어린 학생은 지금쯤 영화사 스태프나 유명한 감독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크린에 비가 내려도, 담배 연기로 목이 막혀도, 스크린을 가린 앞사람 뒤통수가 너무너무 미워 보인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요즘은 때권 파는 곳 없나?
금남시장의 매력은 옛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아주 좁은 골목길 체험과 함께 소문난 맛집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동행축제 장보기 후 가볼만한 맛집 몇 곳을 소개한다. 모두 직접 방문했던 곳이다. 이 동네서 33년을 살았고 지금도 어머니께서 금호동4가에 살고 계셔서 자주 오는 곳이다.
#부원냉면
부원면옥이 아니다. 부원면옥은 남대문 시장 안에 있는 평양냉면 집이고 부원냉면은 금호동 금남시장 인근에 있는 함흥냉면 집이다. 금호역에서 내려 금남시장을 가다보면 중간쯤 대로변에 있다. 두 냉면집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언론매체 조차 부원면옥을 부원냉면으로 표기한다. 덕분에 부원냉면은 가만히 앉아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셈인데, 함흥냉면 탑티어급 맹주다.
자가제면으로 뽑은 면발이 섬세하고 잘 먹힌다. 오장동 함흥냉면처럼 질긴 전분 면이 아니라 메밀을 적당히 섞어 식감을 유연하게 했다. 비빔냉면 소스 맛이 일품인데 오장동과는 결이 다른 맛이다. 고명으로 올린 소고기 질이 좋고 여기서 뺀 육수 또한 농후하고 고소해 뜨겁지만 자꾸 먹힌다. 갔다하면 육수를 두 주전자 정도 먹고 오는데 이열치열하기 딱 좋은 별미다.
주방에서 면을 직접 쳐내는 여사장님 표정에는 자부심이 그득하다. 자신의 음식이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만 있으면 ‘미어터질’ 집이다. 날이 더워진다. 부원냉면 한 그릇으로 맹하를 다스려 보시길.
#은성보쌈
금남시장 내에 있다. 개인적으로 애정하던 곳이다. 삼겹보쌈(소자)에 생굴 한 접시면 두 사람이 배를 두드린다. 손님이 몰리는 날엔 삼겹보쌈인지 은성보쌈(퍽퍽 다릿살)인지 잘 살펴야 한다. 가끔 홀 서버들이 서빙미스를 한다. 삽겹과 다릿살은 가격차도 나지만 맛 차이가 크다.
싱싱한 굴을 원한다면 오전에 방문하는 게 좋겠다. 보쌈도 마찬가지다. 늦으니 상태가 좋지 않다. 밥심으로 사는 시골 출신 후배 덕에 밥을 넣어 합(김치 깔고 수육 얹고 굴, 발, 새우젓, 마늘 등)을 맞췄더니 별미다. 은성보쌈, 40년이 후쩍 넘은 노포지만 주인이 바뀌어 손맛도 살짝 변한 듯해서 개인적으로 요즘은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저력이 있는 곳이라 지금도 손님이 많다.
#골목냉면
Since 1966. 이쯤 되면 서울미래유산감이다. 자칭 ‘금호동 명물’, 내게 있어선 추억의 금호동 금남시장 골목냉면이다. 차일피일 하다가 근 몇 년 만에 들린 듯하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 따라 몇 번 가고 까까머리 중딩이 돼선 친구들과 찾았던 금남시장 골목냉면.
한 자리를 참으로 오래도록 지키는 노포다. 그 옛날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냉면이라 여겼던 골목의 맛이 이젠 추억으로만 남았다. 평양냉면을 아고부턴 잘 안 가게 된다. 물냉 보다 비냉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