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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안 Jun 06. 2021

생명, 선

이소라 - track 9


https://youtu.be/5LzfjF1ESIc (☜이소라 track9 듣기)


토요일 오후 3시. 평일에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고 나니, 토요일의 절반이 넘어갔다. 벌써, 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와 곧장 헤드셋을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10분가량 천천히 걷다 보면 작은 하천 하나가 나오는데, 물 길옆으로 널따란 트랙이 나란히 펼쳐진다. 볕이 좋으니 오늘은 그곳을 걸어야겠다.     



저만치에서 보이는 하천의 입구 너머로 노란 물결이 잔잔히 흐른다. 하천을 따라 늘어선 유채꽃이 옅은 바람에 살랑대며 출렁였다. 샛노란 유채꽃 앞에 놓인 붉은 트랙. 길은 햇볕을 받아 광채를 내며 더욱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온기를 잔뜩 머금은 따사로운 길. 그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뎌 본다.     



드르륵. 시잉. 드르르륵. 스케이트보드 달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빠르게 움직이는 보드 위로 올라탄 한 소녀. 뻘뻘 흘리는 땀 밑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을 세워 힘차게 내달린다. 아이는 한 번씩 땅을 내딛는 왼발로 속도를 높여 거침없이 다가왔다. 한껏 낸 속도 때문인지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경주마의 꼬리처럼 휘날린다.

어쩐지 나를 닮은 것만 같은 아이. 씽씽,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던 20년 전의 내가 떠오른다. 엄마 심부름을 핑계 삼아 열심히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스케이트 소녀. 달리면서 잃어버린 여러 머리띠 때문에 심부름해도 엄마에게 자주 혼났던 그때가 생각이나 웃음이 났다. 생에 가장 씩씩했던 어린 나와 보드 위의 소녀가 서로 포개져 나를 제치고 간다.     



노랗게 일렁이는 유채꽃밭 옆으로 중년 부부가 걸어간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햇볕을 맞으며 산책 중이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수가 적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진 않지만, 붙잡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속도를 맞춰 몇 번의 발걸음을 옮기던 그들이 이내 멈추어 선다. 그리곤 남자는 아내를 유채꽃 앞에 세운 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살랑거리는 유채꽃 사이로 경직된 채 서 있는 아내. 들이민 카메라를 의식해 몇 번의 포즈를 잡아보지만 어색함이 묻어있다.

사진을 찍기 전, 남편은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만져준다. 그리고 주변을 살핀 후, 아내의 마스크를 벗긴다. 마스크 안으로 굳어있던 얼굴이 금세 웃음을 찾았다. 떨어지는 오후의 햇살, 그 밑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유채꽃, 그리고 아내.

‘하나, 둘-’

남편은 해사한 모습의 아내를, 또 아내를 닮은 풍경을 몇 차례 사진으로 담았다. 찰칵, 찰칵 들리는 소리와 함께 수줍게 퍼지는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그 뒤로 이따금 만난 어린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자전거를 타는 젊은 외국인 커플, 라디오를 벗 삼아 산책하는 할아버지까지. 하나의 선 위로 서로 다른 시간의 생명이 활기를 띠며 넘실거렸다. 생명 가득한 이 길은 생동의 빛을 발하며 내내 반짝였다. 나는 하나의 선 위로 공존하는 생의 모든 자취를 걷고 또 걸으며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나의 과거였던, 또 지금의 나이거나 혹은 미래일지 모를 여러 생이 트랙 위를 걸었다. 나와 함께, 같은 하나의 선을.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평일 내 쌓인 생각을 정리하려 산책을 했습니다. 집 근처에 흐르는 하천을 따라 펼쳐진 트랙을 걸으며 이소라 님의 노래 Track9을 들었어요. 이소라 님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인데요, 삶에 안온함이 사라지고 과거의 불안까지 찾아올 때, 자주 듣습니다. Track9을 반복 재생하며 길을 계속 걸었어요. 따스한 햇볕과 평온한 길, 몇몇 행인의 소소한 말소리까지 더해지는 그곳은 더 없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편안해진 마음으로, 오늘 한 가지 소원을 빌었습니다. ‘지금처럼 평화롭길. 오늘처럼 모두 지나 보낼 수 있길.’ 하고 말이죠. 소중한 생을 살고 계신 여러분, 모두 평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영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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