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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안 Oct 17. 2021

젖 먹던 힘까지

<1과 31> 30살 어린 인생 스승을 만나다. 



어쩌다 보니 언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본가 탈출과 언니의 육아 보조를 맞바꾼 것인데, 이 계약은 한마디로 사기였다. 당시 독립이 절박했던 나는 부모님에게서 멀어지는 것만이 자유라 착각했다. 



모아둔 독립 자금은 없었지만, 내겐 언니가 있다. 마침 올해 첫 아이를 낳은 언니는 생후 60일이 된 사랑둥이를 미끼로 나의 절박함을 사로잡았다. 육아 경험이 전무한 이모가 육아의 진면모를 알 리가 있나. 



육아란 조카를 돌보는 일인데, 조카가 귀여워. 그렇다면 '육아는 귀여운 건가!'라는 대 착각 속에서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120일째 육아 전쟁을 치르며 조카와 사투 중이다.



하나의 생명이 자라는 일련의 과정에 함께 하는 일은 괴롭지만 동시에 경이롭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조카를 발견할 때면 온몸에 엔도르핀이 돌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엄마'라고 말하는 것. 



'엄마'라는 단어 하나에 정확히 도달하기까지 아이의 입에선 긴 시간 진화 과정이 일어난다. 엄마의 첫 생김새는 으아, 어마 등 주로 모음 위주의 단순한 형태를 띤다. 이후, 소리는 세포 분열을 하듯 음마, 또는 맘마 등의 복잡한 단어로 발전하는데, 받침 하나를 추가하기 위해 아이에게 필요한 시간은 최소 30일. 



그렇다면 아이가 하루에 엄마를 부르는 횟수는 몇 번일까? 정확히 세보진 않았지만 짐작건대 5분에 한 번쯤은 된다. 젖을 먹기 위해, 자신의 특정 불편함을 알리기 위해, 또 잠을 자기 위해 아이는 온종일 '엄마' 비슷한 실패작을 수없이 던진다. 그렇게 하루 수십 번의 실패가 쌓이고, 그 하루들이 모여 실패 뭉치가 불어나면, 어느 날 아이의 입에서 엄마를 정확히 부르는 소리가 나온다. 기나긴 시행착오 끝에 조카는 실패 더미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것이다.



아이의 성장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변화는 '뒤집기'였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관용어 '젖 먹던 힘까지'를 31년 만에 직접 목격했다. 실제로 아이는 모유를 먹을 때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전력을 다해 끌어모은 모유의 힘이 가장 많이 쓰이는 일은 뒤집기. 



조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100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가 평생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느 세월에 몸을 뒤집어 기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조카에게서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가 왼쪽으로 기울기를 몇 주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배를 땅에 대고 눕히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배에 힘을 줬다. 곧이어 반동을 줘 몸을 양옆으로 흔들기 시작하면 머리가 축축이 젖을 정도로 땀이 흘렀다. 그러다 힘들어지면 으앙 소리를 내며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뒤집기에 성공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다. 겨우 100일을 넘긴 아이가 좌절이란 감정을 알까 싶어 웃음이 났지만 진짜 웃긴 건 그다음이다. 타인의 도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은 뱃심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쳐버린 조카에게 손을 내민 적이 있다.



"밀라야 힘들지? 이모가 한번 도와줄게."



나의 선행이 조카에게 비수를 꽂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를 들어 편히 숨 쉴 수 있도록 다시 뒤집어 주니, 그는 좌절보다도 더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아이의 눈물과 콧물에 범벅이 된 채로 묻어났다. 그건 마치 '내가 직접 뒤집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기다려주지 않느냐!'라는 원망과 동시에 기회를 박탈당한 허탈감 같은 것이었을까? 알 수 없는 미안함에 아이를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는 난관에 직접 뛰어들기를 자청했고, 그 뒤로도 몇 주간 더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다.



조카가 눈을 떠 잠이 들 때까지 하는 일은 뒤집기였다. 당시 아이의 생의 목표는 뒤집기였고, 그의 시간은 토할 때까지 연습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실제로 이, 아니 잇몸을 악물고 뒤집기를 연습했다가 모유를 울컥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나는 고군분투하는 조카의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나를 떠올렸다.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며 소위 젖 먹던 힘까지 살아봤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던가? 



몇 년간 진로 선택과 재취업을 반복하며 자존감을 덜어냈다. 반복된 실패는 새로운 목표도, 그것을 세운 자신도 믿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목표를 꿈꿔도 될까?'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확답도 없이 몇 년을 지지부진하게 끌어왔다. 만약 오늘의 좌절을 맛본 조카가 내일의 도약을 거부한다면 그건 지금의 나일 것이다. 며칠 후, 조카는 보란 듯이 뒤집기에 성공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엉터리 단어를 뱉거나 어설프게 바닥에 착지했을 때에도 나는 늘 같은 말을 했다.



"밀라가 내일이면 진짜 성공할 것 같아."



아이의 노력은 타인의 마음마저 흔들었다. 저 노력의 끝은 분명 아이가 원하는 목표 달성이겠구나 라는 믿음. 무엇보다 노력의 원천에는 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발견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전했다. 실패하더라도 주변의 눈치에 휩쓸려 포기하거나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분노하고 좌절했다. 그리고 다시 도전했다. 



결국, 나와 조카의 차이점은 실행 여부였다. 반복된 실패로 잔뜩 겁먹은 이모는 암울한 미래만 상상하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외부 세계에선 그 나약함이 나를 향한 의심으로 변형되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들의 불신에 함께 동의했던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동안 도대체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위해 도전해온 것일까? 뒤집기에 이어 되집기까지 가뿐하게 성공하는 조카를 보니 창피함이 밀려왔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은 실패만 기억하지 않는구나. 타인의 시선에 상관없이 다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구나. 그래서 너는 정말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거구나.



평생 누군가의 도움 없이 꿈쩍도 못할 것 같은 아이가 조그만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뒤집기에 성공한다. 젖 먹던 힘을 다해 허벅지를 끌어와 기어가기에 돌입하고, 만 번의 옹알이 끝에 대화를 시작한다. 나는 조카의 수많은 시도와 좌절을 지켜보며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하루하루 원하는 목표에 집중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를 삶의 본보기로 삼는다. 



사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좌절 대항력'이 탑재되었을지 모른다. 그 능력으로 우리는 먹고. 말하고, 걷는 단계를 돌파해 성인이 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삶의 과도기를 밟아 나갈 것이다. 나는 조카와 눈을 맞춰 다짐한다. 나 역시 그처럼 나를 키운 좌절 대항력으로 도전하는 삶을 이어가겠노라고.




'밀라야, 매일 씩씩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이모도 젖 먹던 힘까지 힘내서 살아갈게. 나 자신으로, 나만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아볼게!'




2020년 8월, 여름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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